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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Feb 03. 2021

군 쿠데타, 수치와 미얀마 기로에 서다

에세이


 2월 1일 새벽, 미얀마에서 군부 주도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문민정부의 실질적 지도자 아웅산 수치를 비롯해 정부 고위 인사들이 구금되었고 권력은 군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군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1년 간 집권할 것을 선언했다. 2일 군부는 문민정부 장·차관 24명을 갈아치우며 11개 부처 장관을 새로이 임명하였다. 군부의 쿠데타는 지난해 11월 총선에서부터 그 기미를 보였다.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은 총선 결과 전체 선출 의석의 83%를 점유했다. 흘라잉과 군부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쿠데타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입에 담았다. 말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미얀마의 민주주의에 암운이 드리워진 가운데 생각해본다. 왜 쿠데타가 발생하였는가?

 쿠데타는 예정되어 있었다. 미얀마는 반쪽짜리 민주주의 국가였으며 수치와 민주주의민족동맹은 반쪽짜리 정부였기 때문이다. 군부 독재에 의해 제정된 헌법은 군부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군부는 의회 의석의 25%를 할당받았으며, 군부의 정당인 통합단결발전당(USDP)에서도 의원을 배출하였다. 또한 국방 및 치안과 관련된 부처의 수장을 군부가 독차지하였다. 한편, 헌법에 따르면 외국인을 친족으로 하는 이는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 민족동맹과 민주화 세력의 실질적 지도자인 수치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양분된 권력체계와 군사 및 치안력을 장악한 군부의 존재로 인해 문민정부는 국정운영에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문민정부는 군부에 끌려 다니고 말았다.

 그 대표적 사례가 ‘로힝야족 집단학살’이다. 로힝야족 집단학살의 실질적 주도자는 바로 흘라잉이었다. 그는 2009년 샨족 5만 명과, 코캉족 3만여 명을 쫓아낸 전력이 있었다. 그 과정에 살인, 약탈과 방화, 강간 등을 저질렀고 이는 로힝야족 집단학살에 그대로 동원되었다. 흘라잉의 주도 하에 로힝야 반군에 대한 진압과 소탕이 이뤄졌고, 이것은 더 나아가 집단학살과 추방, 강제수용으로 이어졌다. 60여만 명의 로힝야인이 거주지를 떠나 난민이 되었고, 12만 명이 라카인주에 강제 수용되었으며, 아직도 이들을 포함 60만여 명이 미얀마에 남아 위태롭게 삶을 연명하고 있다. 미얀마 국민들의 로힝야족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 탓에 여론은 군부의 폭력에 찬동과 지지를 아끼지 않고 있다.

 17년 당시 미얀마 민주화의 기수이자 상징인 수치는 로힝야족 집단학살에 대해 침묵 내지 방관 또는 동조하였다. 미얀마 국민들의 여론과 정서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에 의한 식민지 통치 시절, 친영 세력인 로힝야족의 수탈에 대한 증오와 원한은 차별과 폭력으로 세습되어왔다. 미얀마 내 다수인 버마인은 물론 소수민족들조차 로힝야족에 대한 앙심이 깊어졌으며 미얀마의 대부분이 불교도인데 반해 로힝야족은 이슬람교였다. 이러한 원한 관계와 상이함으로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에 대해, 반쪽짜리 민주시민들은 반대는커녕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군부는 로힝야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희생양 삼아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 군부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수치와 문민정부는 집단학살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패착으로 이어지는 자충수가 되었다.

 로힝야족 집단학살에 대한 묵인으로 국제사회의 많은 이들이 노벨평화상 수상 철회를 외치며 수치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로힝야족 집단학살에 대해 수치가 그간 고수해온 민주주의 가치의 기치 하에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면, 또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힘입어 군부와 국민들에게 학살과 추방, 강제수용을 멈출 것을 호소했다면, 수치는 정권을 연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군부의 독주를 제지하고 문민정권을 다시 재창출하여 독재를 막기 위해 수치는 독이 들은 잔을 마셨다. 수치는 반평생을 인권을 중시하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민주화 운동을 벌였으나 로힝야족의 인권을 고려치 않은 결코 떳떳할 수 없는 선택을 내린다. 로힝야족을 부정하고 배척함으로써, 수치는 재집권하는 데 성공했으나 군부의 쿠데타로 결국 실패를 맞았다.

 쿠데타를 저지하고 민주화를 실현하고 소수민족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아웅 산 수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에서부터 답을 찾아본다. 미얀마의 국부이자 수치의 아버지인 아웅 산은 1947년 2월 12일 미얀마의 모든 소수민족을 통합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소수민족대표들과 함께 ‘팡롱 협정’을 이끌어냈다. 이는 소수민족의 자치와 권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미얀마에 모든 국민의 단결을 위한 큰 결단이었다. 그러나 아웅 산이 암살된 후 팡롱 협정은 무효화됐다. 62년 군부의 최고지도자인 네윈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찬탈한다. 그 후 군부독재가 이어져오며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이어져왔다. 수치는 어머니의 간병을 이유로 귀국 후 군부독재에 의한 참상을 목도하고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수치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그녀의 아버지가 아웅 산이었던 것이 크게 한몫했다. 실제로 그녀는 군부로부터 감금 이외의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녀가 비록 절반에 불과했지만 미얀마에 민주화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웅 산의 후광과 유산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 유산에 과제이자 해답의 실마리가 남아있다.

 바로 아웅 산이 소수민족들과 미얀마인들을 통합하는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수치는 2016년에 그동안 이어온 유혈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개최한 미얀마 평화회의를 ‘21세기 팡롱’이라 부르며 개막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국가적 화해와 국가적 통합을 달성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지속 가능한 평화 공동체를 구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단합할 때에만, 우리의 국가는 평화로울 것이다. 우리 국가가 평화로울 때, 지역 내 그리고 전 세계 다른 국가들과 대등한 지위에 서있을 수 있을 것이다.”

 향후 미얀마의 혼란한 정국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할 수 없다. 수치와 미얀마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군부독재를 막고 미얀마에 민주주의와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서 수치와 미얀마 민주시민들은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 결단은 희생양을 통한 단결이 아닌, 미얀마인들과 소수민족들 간의 화해와 평화의 단결이어야 한다. 어느 2월 12일, 팡롱 협정의 진정한 가치인 화해와 통합이 실현된 진정한 연합 기념일이 미얀마에 하루속히 와 기념할 수 있기를 바란다.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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