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아트 슈피겔만'을 읽고
<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에서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이르러 집단학살당한 것에 대한 어느 생존자의 회고이다. 그의 이름은 블라덱 슈피겔만으로, 저자의 아버지 되는 이다. <쥐>는 아들인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의 구술을 만화로 그린 작품이다. 이 책은 블라덱을 비롯한 유대인들의 수난기이자 블라덱의 생존기이며, 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쥐>는 초반부 모험담으로 읽힌다. 블라덱은 수완이 좋은 젊은 사내였고, 부유한 유대인 가정의 아냐와 결혼하여 장인으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공장을 받아 경영한다. 블라덱과 아냐는 첫아들인 리슈를 얻고 행복해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나치 독일의 마수가 서서히 뻗쳐오자 블라덱과 그의 가족들은 생존을 위해 분투한다. 유대인들의 수난이 시작되며 이야기는 블라덱 일가의 생존기로 변한다. 위기와 선택의 순간마다 블라덱은 기지를 발휘하며 운도 따라준다.
블라덱은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예비군으로 징집되어 참전한다. 그는 전쟁포로로 붙잡히고 포로 송환 도중 나치 독일에 총살당할 위기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나치에 점령당한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점차 자유를 제한받는다. 이들은 자택에서 게토로 내몰리고 게토에서 또 다른 게토로 내쫓기며, 결국 대다수는 아우슈비츠로 내던져지고 만다. 블라덱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은 가진 재물을 바치고 재주를 부리고 기회를 엿보며 도사린 위험 속에도 삶을 도모하지만, 운이 좋은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블라덱과 아냐 또한 이 생존의 노정에서 일가의 대부분을 잃는다. 그들은 어린 아들 리슈마저 잃는다. 아냐는 깊은 절망과 실의에 빠져 삶을 영위하길 포기하려 하지만, 블라덱은 한사코 삶을 포기하지 않으며 아냐를 위무한다. 게토에서 도망쳐 폴란드 농가에 숨어든 이들은 폴란드인 브로커를 통해 헝가리로 벗어날 계획을 세우지만, 브로커들의 배신으로 나치에 붙잡히고 아우슈비츠로 향한다. 그렇게 블라덱과 아냐, ‘유대인들의 수난’이 계속된다.
<쥐>에서 인간군상은 국가·민족별로 동물로 표현된다. <쥐>는 실제 사건임을 떠나 이로 인해 우화적으로 읽히고, 독자들은 경계와 거부의 허들을 낮추어 이야기에 빠져든다. 독자는 일종의 우화와 모험담을 읽듯이 읽어나가며 블라덱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고, 이윽고 유대인들의 수난과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블라덱의 구술과 시선으로 목도하며 ‘덫’에 걸려들고 만다. 쥐로 표현되는 블라덱과 아냐,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음의 덫인 홀로코스트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치다 아우슈비츠라는 거대한 덫에 걸려 죽음의 수렁에 빠져드는 것을 목격한다. 철저한 폭력 앞에서 블라덱과 아냐의 처절한 생존을 더듬어 읽어가며, 우화를 가장한 실화는 민낯의 실화보다 더 예리하게 독자의 마음을 헤집어놓는다. 독자는 상상을 동원해 우화의 가면을 벗겨내고 유대인에게 행해진 멸절과 그럼에도 불구한 삶의 의지를 마주한다.
블라덱과 아냐는 살아남는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고, 순응한 또는 맞섰으나 죽은 다른 유대인들보다는 운이 좋았다. 그들은 다시 아이를 낳았고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었을 즈음 아냐는 자살한다. 아냐는 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일까? 아냐가 젊었을 때부터 정신적으로 쇠약했기에? 죽은 가족들을 잊지 못했기에? 아우슈비츠에서 이미 삶을 마감했기에? 살아서도 그 참극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에? 그래서 삶에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했을까? 아냐의 자살로 아버지와 아들은 멀어지고 만다. 아냐의 죽음은 블라덱, 아티 모두에게 상처였으며, 아냐의 부재로 블라덱과 아티는 서로의 간극을 좁히지도 메우지도 못했다. 그 후, 아티는 부모님의 얘기를 만화로 그려내길 원했고,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아간다.
<쥐>는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아티의 어린 시절 일화를 소개한다. 여기서 두 부자의 관계와 온도 차가 드러난다. 어린 아티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아버지에게 친구와 우정에 대해 토로하나, 아버지 블라덱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우정에 냉소적인 시선으로 어린 아티는 아직 이해하지 못할 말 몇 마디를 내뱉는다. ‘친구? 네 친구들? 그 애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 전후에 태어난 아티와 홀로코스트를 겪은 블라덱 간에는 함부로 이해하기 어려운 괴리가 놓였다. 아티에게 아버지는 지독한 구두쇠에,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아티는 이러한 아버지의 면면들을 여과 없이 <쥐>에서 보여준다. 아버지와의 불통은 아티의 젊은 시절 내내 그를 옥죄었다.
그런데 <쥐>를 작업하면서 아티는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이해한다. 블라덱의 강박과 강퍅함은 학살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으며 살아남았기에 얻은 고통과 슬픔의 발로였다. 블라덱은 산소통과 심장약을 두고 다녀서는 안 되는 망가진 심장을 가진 쇠락한 노인이자, 살아남았음에도 죽어버린 아냐의 남편이었으며, 나치의 학살에서 어린 아들 리슈를 비롯한 가족과 친구, 동포들을 잃고 홀로 살아버린 이였다. 그리고 그는 아들인 아티에게 남은 한 푼이라도 더 물려주기 위해 아끼는 아버지였다. 아티는 <쥐>의 작업을 통해서야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티는 아버지와의 소통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 일가, 유대인들의 고통을 이해한다.
<쥐>는 수용소에서 탈출한 블라덱이 고생 끝에 마침내 아냐와 해후함으로써 이야기를 마친다. ‘아냐를 기리며’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쥐>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아들이 그림으로 그려낸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아내이자 어머니인 아냐와 가족들을 기억하고, 기억하기 위해 써내려간 부자의 기록이다. <쥐>는 블라덱과 아티 부자가 홀로코스트와 희생된 가족, 그리고 아냐를 기리는 진혼곡이자 그들과의 화해를 위한 헌정곡이다. <쥐>를 작업하던 도중 블라덱은 죽었고, 아티는 딸인 나디야를 얻었다. 언젠가 나디야 또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알고 있듯이. 삶은 계속되며 이야기는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