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찾자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알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의 정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행복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느끼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자신을 알고 사랑하며 관리하여야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고 관리하는 것은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고 실현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관리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의 감정을 조종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을 실천하는 데 있어, 자아를 찾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아를 찾자
그렇다면 나는 누구이냐를 묻기 전에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하여 보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류가 탄생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인류가 미개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 얼마나 느리고 불완전했는지, 천문학상의 셀 수 없는 정도로 많은 시간에 비하면 인류가 존재해온 역사는 얼마나 짧은지 생각해보라고 한다. 사실 그렇다. 사람은 우주에 비해 아주 미미한 존재이다. <버트런드 러셀 저, 이순희 역, 「행복의 정복」(서울: 사회평론, 2008) p.242>
우주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자들이 연구하는 대상이다. 철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가끔 하늘이나 우주를 먼저 설명한다. 중국 반고 신화에서도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렸다'면서 천지창조를 말한다. 우리나라 단군신화에서도 천제인 환인이 자신의 서자 환웅을 하늘의 세계에서 땅의 세계로 내려 보냈다. 성경에서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한다. 중국 진(晉) 나라 책 「천문지(天文志)」에서는 “우주가 기(氣)로 이루어져 있어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었고, 무거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 땅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의 모형은 구형이고 그 중심에 공 모양의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고 하였다.
옛날 철학자들이 우주를 생각한 것은 우주 속에서의 사람의 위치를 찾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우주를 닮았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들은 우주를 완벽한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굉장히 질서 정연하고 조화로운 것으로 생각했다. 예로서 서양에서 우주를 영어로 ‘cosmos’라고 한다. ‘cosmos’는 질서와 조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양에서 ‘우주’는 세계의 총체 또는 근원을 지칭한다. 그래서 우주는 상제(上帝), 천(天), 천지(天地), 도(道), 자연(自然) 등의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우주는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우주에 비하면 강가의 모래알과 같이 작다. 그런데 우리는 지구조차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물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태양에는 백만 개의 지구가 들어갈 수 있으며, 은하계에는 태양과 같은 항성이 1천억 개 이상 있으며, 그리고 우주 속에는 이렇게 거대한 은하계가 또 수천억 개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공간적 개념에서뿐만 아니라 시간적 개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주는 약 150억 년 전에 빅뱅이라는 엄청난 폭발에 의해 만들어졌다. 우리가 속해있는 은하계는 약 120억 년 전, 그리고 지구는 약 45억 년 전에 생겨났다. 그런데 현대 우리 인류가 탄생한 것은 길어야 5만 년에 불과하다. 인간 문명 발달에 결정적 기여를 한 농업도 1만 년 전에 시작됐다.
이와 같이 사람은 우주에 비해 미미한 존재이다. 사람은 우주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이해하는 우주도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 범위 내에서 옳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주의 본질을 옛날 철학자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조화와 질서로 이해하고자 한다. 우주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법칙이 있을 것이다. 거대한 존재가 장구한 시간 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법칙은 조화와 질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사실 나는 폭우를 동반한 태풍도 하나의 조화라고 생각한다. 무서운 태풍은 산도 무너뜨리고, 골짜기도 파헤치고, 강도 범람시키면서 많은 것을 파괴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파괴는 이전의 더럽고 지저분한 것을 묻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파괴 이전의 더럽고 지저분한 것은 태풍이 아니면 고치기 어렵다. 뿐만 아니다. 만약 태풍이 없다면 바다 깊숙한 곳에 산소를 공급할 수 없어, 바다가 썩어 생명체가 살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태풍도 조화와 질서를 위한 새로운 창조이다. 우주의 근원적 법칙을 조화와 질서라고 할 때, 우주를 닮은 사람의 본성도 선할 수 있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동양에서는 우주의 기원과 생성과 변화의 근원을 해명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송나라 성리학은 태극인 이(理)와 음양오행인 기(氣)의 결합에 의해 이기론적 우주관을 발전시킨다. 주돈이(周敦頤)는 「태극도설 (太極圖說)」에서 우주의 본질을 태극으로 보고, 이 태극이 음양오행과의 결합으로 만물을 생성하며 변화를 무궁하게 이어간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사람을 소우주로, 세계를 대우주로 본다. 예로서 원형이정(元亨利貞)은 하늘의 떳떳함이요,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사람 본성의 기본강령이라고 한다. 사람 본성이 선하다면, 사람은 위대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천지자연의 조화와 질서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천지자연의 조화와 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지적능력과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지적능력과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 버트런드 러셀은 사람은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우주 공간 어디에도 사람과 같은 능력을 지닌 생명체의 존재가 밝혀진 바가 없다는 점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아주 잠깐이라도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라도 사람의 위대한 정신을 느껴본 사람은 비열한 행동이나 이기적인 행동을 하거나 사소한 불안에 안달하거나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버트런드 러셀 저, 이순희 역, 「행복의 정복」(서울: 사회평론, 2008) p.243>
위대한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우주의 구석구석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이런 사람은 인간적 한계가 허용하는 것만큼 올바르게 자신과 인생과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짧고 하잘 것 없지만, 사람의 정신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세계를 반영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만큼 위대한 존재다. 이런 사람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생겨나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강렬한 기쁨을 느낄 것이며, 표면적인 생활이 갖는 곡절을 겪는다고 해도 깊은 본질에서는 늘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버트런드 러셀 저, 이순희 역, 「행복의 정복」(서울: 사회평론, 2008) p.244>
러셀이 주장한 바와 같이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정신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그 위대한 정신을 실현해야 한다. 사람의 위대한 정신은 바로 사람의 본성이다. 자신의 본성을 찾는 것은 자아를 찾는 것이고,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은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본성대로 살지 않는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성에 따라서 살 수 없다.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서는 사람으로서의 보편적 특성과 자기만이 갖는 개별적 특성을 동시에 이해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