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래빗 다시 읽기 - 진저와 피클
진저(고양이)와 피클(개)은 동네 잡화점을 연다. 가게는 항상 북적이고 다양한 동물 손님이 오간다.(그중엔 쥐 손님도 있어서 진저의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어쨌든 가게는 꽤 성황리인 듯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진저와 피클은 항상 먹을 것이 없어 가게 내의 재고-말린 물고기와 과자-등으로 배를 채우며 주린 배를 쓰다듬는다.
(그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들 자신은 분명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손님들은 많지만 다 외상으로 물건을 사 갔기 때문이다. 작은 동네라 ‘신뢰’를 무기로 말이다. 손님들은 외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외상목록은 길어지고 진저와 피클은 계속 배가 고프다. 게다가 세금 청구서가 중간에 날아온다. 그들은 이제 감당할 수가 없다.
여기서 동화는 끝나지 않는다. 진저와 피클은 각자의 살길을 찾아 나선다. 진저도 비공식적 사냥?(그림엔 굴 근처에 덫을 놓으며 다니는 걸로 묘사된다)에 나서고, 피클은 사냥터 관리인이 된다.
이후 다른 동물(닭)이 가게를 인수해서는 절대 외상으로 물건을 팔지 않는다.
동화 중에서 가장 동화 같지 않은, 나에게는 거의 다큐 리얼리티가 따로 없었다. 외상=신용카드로 본다면 개인의 측면에서 경제관리를 못하면 결국 파산에 이르는 결말이거나, 자영업자의 상권 분석 오류로 현금 흐름이 막혀버린 딱한 동네가게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 경험에 비춘다면, 이혼의 한 부분을 차지한 것도 전 남편의 알려지지 않은 부채도 있었다. 진저와 피클이 부부로 묘사된 건 아니지만(그들은 동업자 관계로 보인다) 가게 폐점 후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이혼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는 자기 전 어느 날 밤, 나에게 물었다. 엄마와 아빠가 왜 따로 사는지, 그래서 난 최대한 감정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아빠가 엄마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도토리(돈=생활비)가 부족해서 엄마가 일하러 가게 되었고 지금도 약속(양육비)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얘기해 줬다. 진저와 피클이 각자의 길을 걸은 것처럼 말이다. 아이는 엄마 옆에 아빠가 없어도 괜찮냐고, 다들 있는데 엄마만 없어도 괜찮냐고 물었다. 난 괜찮다고, 엄마가 보란 듯이 당당해질 거라고 얘기해 줬다.
아이러니한 건, 아이가 고양이를 좋아해서인지 이 동화책이 한때-그리고 지금도 가끔-최애 동화책이란 사실이다. 가끔 동화를 읽다가 놀란다. 찰떡 비유를 엉뚱한 곳에서 찾아내고, 동화를 읽다가 리얼리티 다큐상황에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관념도 조기 교육이 필요함을 새삼 느낀다. 필요와 욕구를 구분하는 능력을 어릴 때부터 기르고, 인성을 포함해 상황을 판단하는 혜안을 나의 아이에게 전하고 싶다. 나조차도 비록 살면서 항상 옳은 선택만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내 아이만은 상황과 사람을 바로 보는 능력을 키워주고 싶다.
아이의 양육비는 제대로 보내지 않으면서, 한 달의 두 번 면접교섭 때는 꼬박꼬박 와서는 아이의 손에 인형 한 가방씩 안겨주는 아이 아빠, 당신도 보고 있다면 겉으로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좀 알았으면 한다. 최소한의 경제 행위를 하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플라스틱 장난감 따위보단 차라리 책을 사서 보내고, 아빠란 존재가 아이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을 좀 했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 완벽한 엄마는 아니고, 나아갈 길도 첩첩산중이지만 최소한 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