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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작 Dec 27. 2018

단식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음식에 대한 고찰 9

 그 날을 난 똑똑히 기억한다.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책상에 앉지 않고 동생과 함께 병원을 찾은 날이었다.


 “괜찮아. 간단한 수술인데 뭐. 혼자 갈 수 있어.”


 동생은 씩씩하게, 아니 씩씩한 척 이야기했지만 난 안다. 우리 집 막내는 겁이 많다는 걸. 하여 묵묵히 동생을 따라갔다. 집을 나서면서 여객선이 난파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큰 사고 없이 모두 무사히 구조되도록 도와주세요.


 나의 기도가 전해졌는지 지하철을 타고 병원에 도착할 즘엔 여객선에 타고 있던 승객들을 모두 구했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그 사이 간단히 검사를 마친 동생은 수술실로 들어가고, 난 밤새 날 괴롭혔던 이야기를 손 볼 생각으로 노트를 폈다. 그렇게 여객선 사고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네 시간 즘 지났을까? 동생이 점심으로 준비해 준 샌드위치를 먹고 있을 때 즘 수술을 마친 동생이 걸어 들어왔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고 하지만 수술 환자가 걸어오다니. 남은 샌드위치를 입 안으로 구겨 넣고 동생을 부축해 침대에 앉혔다. 


 “뭐야? 벌써 끝났어?”


 “웅.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잖아.”


 동생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평소 건강염려증이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예민하고 불안에 떨던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이 저렇게 이야기할 정도면 괜찮은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근데 여객선 사고. 승객을 다 구한 게 아니래?”


 “여객선이라니 무슨 여객선?”


 동생이 다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정말이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왜 아침에 여객선이 난파되었다고...”


 “아, 그 여객선? 아까 다 구조했다고 하지 않았어?” 


 “오보였데. 아직 배 안에 있데.”


 “뭔 소리야? 아직 배안에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동생은 수술실에서 막 나오지 않았나. 아마도 뭔가 착각한 거라 생각했다. 난 회복실에 준비된 티브이를 틀었다. 속보 뉴스가 나왔다. 그들은 기울어진 배 영상을 보여주며 배 안에 구조가 안 된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그럼 빨리 구조해야지.”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배가 완전히 잠겨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뭐야? 배 안에 아이들이 있다면서. 왜 가만있어? 배가 완전히 가라앉고 있잖아.” 


 수술받은 동생이 회복되길 기다리는 4시간 동안 우리는 여객기가 침몰하는 장면을, 그 많은 아이들이 수장당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던 날의 나의 일상이다.


 이후 난 세월호 침몰 상황을 그저, 티브이로만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에 큰 죄책감이 들었다. 그 많은 아이들을 구하지 않은 그들이나, 나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세월호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변한 건. 잘못된 일을 봐도 손해 볼까 피하고, 정치적인 색채로 오해받을까 봐 피했던 내가 “앞으로는 절대 가만있지 않겠다! 절대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겠다! 함께 움직이겠다!”라는 생각에 세월호 집회에도 나가고, 팽목항에도 방문했었다. 그리고 2014년 9월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24시간 단식 릴레이’에 동참했다. 


 단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시작했는데 서론이 길었다. 아마도 몇몇 사람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음식 이야기에 왜 갑자기 세월호 이야기지? 왜 갑자기 단식 이야기지?라고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음식을 먹는 행위만큼 의식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먹든 먹지 않든 그 것 역시 음식과 연관있다고 생각하니까. 하여 일단 단식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단식이란 일정 기간 동안 특정 목적을 위해 음식과 음료의 섭취를 자발적으로 제한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특정 목적과 자발적이라는 말이 제일 와 닿았다.


 왜냐하면 난 그때까지만 해도 특정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음식을 제한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식을 할 만큼 특별히 하고 싶었던 것도 없었지만. 언제나 “네 뜻대로 하렴” 했던 부모님의 자유방임적 교육 스타일 때문에 특별히 단식을 하지 않아도 내 뜻대로 할 수 있었다. 물론 내 저칠 체력도 한몫했다. 한 끼만 먹지 않아도 손이 벌벌 떨리고 세상 그 어떤 동물보다 예민해지고 지치는 난 단식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 내가 단식 릴레이에 참여했다. 이유는 딱 하나 세월호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단식에 동참하며 썼던 글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사 개월 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그런데도 진상 규명은커녕 책임자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진상 규명을 위해 세월호 유가족들이 단식 투쟁에 들어갔고 유민 아빠는 40일 동안 단식 투쟁을 하다 급기야 쓰러졌다. 그러나 정작 답을 내놓아야 하는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더 이상은 세월호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했다. 아니 없어야 했다. 그래서 1일 단식 릴레이에 참여했다. 


 아침을 굶었을 땐 실수를 많이 했다. 십분 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버스를 잘못 타고, 내리고, 다시 타고, 돌아가고. 그렇게 반복해서 무려 오십 분에 도착했다. 단 한 끼를 굶었을 뿐인데 내 정신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난 좀비처럼 행동했다.


 점심때가 되자 배가 너무 고팠다. 정말이지 돌도 씹어 먹을 것 같이 배가 고팠다. 함께 한 동료가 음식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침이 흘렀고 심지어 냄새를 따라 식당으로 걸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배가 고프니 몸의 모든 감각들이 예민해져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더 잘 들리고, 음식 냄새를 더 잘 맡을 수 있었고, 혓바늘이 돋을 정도로 냄새만으로도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 설상가상 시간이 지날수록 예민한 감각이 통증으로 다가왔다. 한마디로 고통스러웠다.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 저녁때가 되니 배고픔에 대해서는 초월하게 되었다. 대신 온몸이 자꾸 뜨거워지고 힘이 빠졌다. 배고픔을 잠으로 채우기 위해 침대에 누웠더니 몸이 침대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단 하루 단식을 한 것뿐인데도 한 달 기력이 소진된 느낌이었다. 더 큰 문제는 단식 후에 오는 후유증이었다. 다음날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로 하늘이 돌고 땅이 돌았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여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솔직히 갈등이 생길 때마다 단식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만 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단식이 너무나 흔해져 음식을 선택하듯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하루 단식을 하면서 느낀 건 내가 원하는 걸 들어달라는 단순한 투정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면 나 역시 단식을 멈춰줄께 식의 값싼 흥정도 아니라는 것, 단호한 결단력과 단단한 의지가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생명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되었다.  


 유민 아빠가 이혼을 했고 아이들에게 잘 못 했는지 어떤지. 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이혼을 한 아빠건. 아이를 지킨 엄마건. 아이들이 죽어간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권리를 찾아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 그것이 내가 단식에 동참한 이유다. 


 얼마 전 한국에 다녀가신 교황님이 세월호 가족을 위로하신 말씀으로 끝을 맺을까 한다. 


“고통 앞에 중립 없다.”



 p.s

 20140416. 

 지금 우리가 관심 갖지 않으면 다음에는 우리 차례가 될 것입니다. 

 잊지 말아 주세요. 

 행동해 주세요.


https://tv.kakao.com/channel/2653228/cliplink/38460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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