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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작 Jan 08. 2019

꽃미남 돈가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음식에 대한 고찰 14

 갈비 장사를 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경양식집을 인수하셨다. 내 나이 16살이었고, 그해 88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전후 사정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가 경양식집을 인수하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오빠의 입김이 컸다. 당시 오빠는 21살로 대학 다니는 걸 포기하고 시장을 돌며 장사를 한다고 했다. 그러다 어머니가 경양식집을 인수하자 오빠는 서울 친구들을 데리고 사북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오빠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오빠 친구들은 서울 남자였다. 흐흐. 살다 보니 서울 남자도 보고. 오빠가 막 자랑스럽고 그랬다. 어쨌건 오빠 친구들은 서울 물을 먹어서 그런지 아기 피부처럼 얼굴이 하앴다. 검은 얼굴의 나랑은 비교가 안 되었다. 


 비록 키는 작았지만 캐빈은 12살에 나오는 주인공 캐빈을 닮은, 개구쟁이 오빠도 있었고, 멀대 같이 크고 말랐지만 눈빛만은 태평양처럼 고요하고 우유처럼 부드러운 오빠도 있었다. 어린 내 눈에는 하나같이 다들 멋졌다. 난 눈빛이 태평양처럼 고용하고 우유처럼 부드러운 멀대 오빠를 남몰래 흠모하고 있었다. 


 오빠 친구들은 흰 셔츠에 검은 기지 바지를 맞춰 입고 어머니가 운영하는 경양식집에서 음식을 날랐다. 그걸 오빠들은 서빙이라고 했고, 자신들을 웨이터라고 했다. 처음 들어 보는 서빙, 웨이터라는 말이 왜 그리 고급지게 들리던지. 게다가 오빠들이 서빙하는 돈가스의 맛이란. 허규허규. 사람을 중독시키는 맛이 있었다. 맛도 맛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단계 별로 나오는 음식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돈가스를 주문하면 수프가 나오고, 이어 애피타이저로 샐러드가 나오고 메인으로 돈가스가 나왔다. 그렇게 밥을 다 먹으면 디저트로 차를 주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 난 꽃미남 오빠들이 “밥을 드릴까요? 빵을 드릴까요?”, “후식으로는 무엇을 드시겠어요? 커피와 녹차, 콜라 사이다, 주스가 있습니다.”라고 물어보는 순간이 좋았다. 뭐라고 할까. 마치 프러포즈를 받는 듯 설렜다고나 할까.


 그 순간이 좋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음식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껏 어머니가 주는 대로, 혹은 식당에서 주는 대로 먹는 게 전부였는데 그 순간만은 제한적이나마 내가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선택을 존중해 음식이 나온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마지막 요리가 나오고 꽃미남 오빠들이 “맛있게 드세요.”라고 할 때면 이상하게 송구스러워 자꾸만 땅으로 꺼지고 싶었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건가 싶은, 암튼 뭔가 큰 대접을 받는 느낌이라 황송했다. 


 짜장면을 먹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짜장면은 주문과 동시에 바로 나왔는데, 아무렇게나 대충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갖춰 입은 종업원이 짜장면을 휙 던지듯 식탁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취향에 따라 짜장면에 고춧가루를 뿌리거나, 단무지에 식초를 치는 정도였다. 그런 짜장면과 비교하면 돈가스는 고급 중의 고급 음식이었다. 


 그런 고급 음식을 먹는 순간만은 사북 촌년 홍부용도 고급스러워지는 듯했다. 늘 남의 들러리로만 살던 내가 비로소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오늘은 말이야. 밥이 아닌 빵을 먹을 거야. 뭐랄까. 그러고 싶은 날이거든.”


 내 기분대로, 내 감정의 흐름대로 정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유를 통해 나는 나라는 사람을 새롭게 정의하는 듯했다. 게다가 꽃미남 오빠들의 서빙이라니. 마치 내가 동화 속 공주가 된 느낌이었다. 아마도 이런 느낌 때문에 사북에 많은 여성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고, 덕분에 우리는 조금 형편이 나아졌다.


 형편이 나아졌다고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갈빗집을 하면서 딱 한번 나를 위해 갈비를 구워준 것과는 달리 어머니가 종종 돈가스를 튀겨 주었다. 그때 먹은 돈가스 맛을 난 절대 잊지 못한다.


 하여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나는 가까운 돈가스 집을 찾는다. 돈가스 집에는 앞치마를 두른 아줌마들이 우리가 미처 자리엔 앉기가 무섭게 수프를 내려놓고 주문을 받아 간다. 밥을 원하냐, 빵을 원하냐 묻지도 않고. 이미 밥으로 정해져 있기에. 그리고는 미리 튀겨 놓았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돈가스를 내온다. 미역국과 고추를 반찬 삼아 전쟁터에서 콩 볶듯 허둥지둥 돈가스를 밀어 넣고 나오는 날이면 내가 음식을 먹었는지, 그저 배를 채웠는지 모를 정도로 맛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럴 때면 그 옛날 꽃미남 오빠들이 차례로 서빙해 주었던 옛날 경양식집 그 느낌 그대로의 돈가스가 그립긴 하다. 


 눈빛이 태평양처럼 고용하고 우유처럼 부드러운 멀대 오빠는 어떻게 되었냐고? 어떻게 되긴. 멀대 오빠에게 말도 부치지 못 한 나의 비루한 짝사랑은 꽃도 피기도 전에 끝이 났다. 그러나 나의 첫 돈가스는 진정 아름다웠다.



 p.s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음식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간직할만한 과거의 자산과 같은 거니까. 그래서 나이 먹는 게 두렵지 않다.


https://www.youtube.com/watch?v=biJVt4j96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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