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참으면 악마가 된다

내 안의 고통과 친구 먹기

by 홍작

01. 고통을 대하는 방법


11월 말, 이맘즘이면 월동 준비를 한다. 옷장 깊숙한 곳에서 두툼한 스웨터를 꺼내고, 길고양이를 위해 핫팩을 쟁여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길고양이를 위해 떠놓은 물이 얼기 시작하면 핫팩을 고양이 집안에 넣어둔다. 핫팩을 넣어준 다음날 아침이면 녀석의 인사 소리가 다르다. 더 다정하고 따듯하게 나를 부르며 꼬리를 바짝 세운다. 핫팩 하나로 달라지는 녀석을 볼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난다. 물론 우리 엄마는 더 큰 마음으로 우리를 키웠겠지만. 갱년기 증상으로 고통을 받을 때마다 엄마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인생 선배로서의 존경심과 딸로서 서운했던 감정들이 섞여 여전히 혼란스럽다.


"엄마. 엄마 예전에 밤에 잠 설치고, 얼굴은 화끈거리는데, 발목은 시리던 거 갱년기 증상이었어."


"갱년기? 그게 갱년기였어?"


엄마는 갱년기가 뭔지도 모르고 지냈다. 그리고 그 결과 당뇨, 고지혈, 고혈압을 앓고 있으며, 최근에는 허리뼈에 금이 가 수술을 받으셨다. 엄마의 모습을 보면 내 미래를 보는 것 같다.


내 어릴 적 엄마는 천상 여자였다. 다소곳하고 아빠 말에 순종적인 너무나 착한 엄마. 돌아보면 그땐 남들에게 착한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어느날부터 악에 바쳐 큰소리를 치며 아빠와 싸우고, 취객이랑 싸우고, 돈 떼 먹은 옆집 아줌마와 싸웠다. 그 때의 엄마는 세상과 홀로 싸우는 독립 투사 같았다. 돌아보면 그때가 비로소 엄마 자신을 위해서 싸웠던 때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난 여성의 갱년기는 더 이상 남을 위해 사는 삶을 접고 자신을 위해 사는 삶으로의 전환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엄마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 남들 앞에서 큰 소리도 내지 못 하던 소심한 모범생이었던 내가 최근 몇년간 끊임없이 화를 내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가슴 저 밑바닥에서 불이 올라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만약 일년전부터 시작된 고통을 무시했다면 나 역시 갱년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갱년기는 정말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 같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때로는 서글프게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쉼 없이 달려오기만 했던 내 몸을 깊이 들여다보고 다정하게 안아줄 기회를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발견할 소중한 기회이다.


물론 병원에서 의사와 상담하고 호르몬 치료를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네 엄마들의 지혜가 담긴, 조금은 느리고 투박한 민간요법에서 먼저 위안을 얻었다. 당연히 이건 의학적 치료를 대신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니 효과도 제각각일 것이다. 하지만 음식을 통해 몸의 균형을 찾아가고, 작은 습관의 변화로 하루의 불편함을 다스리는 그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스스로 나를 돌보고 있다’는 그 느낌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내가 갱년기라는 낯선 터널을 건너며 도움을 받았던 몇 가지 소소한 방법들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02. 내 몸을 채우는 작은 보석들, 콩과 석류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 식물성 에스트로겐이 풍부한 음식들이 갱년기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대표적인 식물인 콩과 석류에 대해 알아보겠다.


콩 : 콩은 ‘밭에서 나는 쇠고기’라는 씩씩한 별명처럼, 콩에는 이소플라본이 가득하다. 나는 매일 아침 밥에 윤기 흐르는 검은콩을 넣어 먹었다. 오독오독 씹히는 고소함이 좋았고, 따뜻하게 데운 두유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날도 많았다. 텅 빈 속에 따스한 온기가 차오르는 그 느낌은, 하루를 시작하는 든든한 에너지이자 나를 위한 작은 의식이었다.

석류 : 석류는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했다는 붉고 영롱한 과일이다. 반으로 쪼갰을 때 보석처럼 박혀있는 알갱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 생명력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즙을 내어 마시기도 하고,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식감을 즐기며 알알이 씹어 먹기도 한다. 붉은 과즙이 온몸에 퍼져 메마른 곳을 적셔주는 상상을 하곤 했다.



03. 마음의 열을 다스리는 차 한 잔의 여유


갱년기는 몸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실은 마음의 변화이기도 하다. 감정의 파고가 수시로 높아지는 이 시기에, 나는 하루 한 번, 오롯이 나만을 위한 찻잔을 꺼내 들었다.


칡차 : 칡은 땅속 깊이 뿌리내린 그 힘으로, 몸의 불필요한 열을 내려준다고 한다. 특히 갑자기 얼굴로 확 솟구치는 열감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받았다. 쌉싸름하면서도 흙내음 나는 구수한 칡차를 천천히 불어가며 마시고 있으면, 머리끝까지 뻗쳤던 뜨거운 기운이 발끝으로 스르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칡은 즙으로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하니 참고하길 바란다.

대추차 : ‘대추를 보고도 먹지 않으면 늙는다’는 어른들 말씀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고, 편안한 잠을 이끄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잘 말린 대추를 푹 고아 만든, 그 달콤하고 진한 차 한 잔은 하루 종일 널뛰던 감정을 차분하게 잠재우는 나만의 ‘특효약’이었다.



04. 꾸준함이 선물하는 놀라운 변화, 생활 습관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의 작은 습관일지도 모른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들이다.


햇볕 쬐며 걷기: 갱년기엔 뼈가 약해지기 쉽다. 그래서 일부러 점심시간이면 20분씩 회사 주변을 걸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도, 살갗에 와닿는 햇살의 온기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비타민D를 채운다는 생각보다, 그저 발걸음에 집중하며 걷는 그 시간이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주는 명상이 되어주었다.

따뜻한 물에 몸 담그기: 혈액순환이 잘 안되면 갱년기 증상은 더 심해진다고 한다. 잠들기 전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는 족욕이나, 일주일에 한두 번 느긋하게 즐기는 반신욕은 정말 좋은 친구였다. 하루의 긴장과 피로가 따뜻한 김과 함께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기분. 그렇게 몸을 덥히고 나면,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불면의 밤도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잊지 말아야 한다. 갱년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고, 그동안 애썼다며 위로의 말을 건네며, 사랑으로 보살펴주는 시간이다. 오늘 내가 나눈 소소한 이야기들이 갱년기라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한 모든 이들에게 작지만 따뜻한 위로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 더 젊고, 지혜로우며, 아름답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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