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록...
너를 처음 만났을 때의 엄마와 아빠
너는 엄마와 아빠가 결혼을 하고 약 2개월이 지나서 우리에게 왔다.
엄마와 아빠가 너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순간의 놀라움과 반가움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 엄마와 아빠는 서울 남동쪽 끝자락에 살고 있었다. 지하철 종점이 있는 한적한 동네였고 조금만 더 가면 경기 하남시였다. 5층 빌라의 4층에 살았고, 넓은 집은 아니었지만 엄마와 아빠가 신혼을 시작하기에는 딱 맞았다.
아빠의 직장은 서초동 교대역 부근에 있었고, 엄마는 경기 용인시에서 연수를 받으면서 실습을 위해 구의역 부근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엄마는 산부인과를 고를 때도 아주 꼼꼼하게 살핀 다음에 정했다.
너를 가졌다는 소식을 할머니, 할아버지께 말씀드리자 네 분 모두 매우 기뻐하셨다.
너를 갖고 나서의 엄마와 아빠
엄마가 연수를 마치고 경기 부천시로 발령이 났다. 급히 이사했다. 너가 태어남과 동시에 엄마가 휴직을 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몇 개월만 짧게 거주할 수 있는 오피스텔을 찾았다. 시일이 촉박했지만, 부천시청역 부근의 깨끗한 복층 오피스텔을 찾아서 다행이었다.
다만, 겨울에 추웠고 여름에 더웠다. 침대가 없어서 매트를 깔고 잤고 추울 때는 그 위에 방한 텐트를 치고 잤다. 에어콘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작고 오래되어 성능이 좋지 않았다. 너를 갖고 체중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던 엄마가 그 좁고 불편한 집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그 집에서는 엄마가 출산휴가를 하기 전까지 살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그 집에서 지내며 엄마는 부천으로 아빠는 서울로 출퇴근을 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원래 집이 있는 서울 송파구로 와서 지냈다. 주말을 이용해서 산부인과 진찰을 받았다. 초음파 사진을 찍을 때마다 쑥쑥 커 있는 너를 확인하면서 엄마와 아빠는 신기했다. 부천에서 서울을 오갈 때는 주로 서울외곽순환도로를 타고 다녔다. 차가 좀 작았는데 그래서인지 소음과 진동이 컸다. 너가 태어나면 더 크고 좋은 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이때 했던 것 같다.
엄마는 너를 갖고도 힘든 내색 하지 않고 씩씩하게 일했다. 야근도 많이 했고, 주말에도 출근해서 일했다.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은 엄마가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엄마의 직장에서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함께 걸어오며 산책을 하기도 했다.
너가 태어나기 두 달 전쯤, 아빠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약 한 달 동안 일을 쉬었다. 그때 너의 할머니가 앓고 있는 병명이 밝혀졌다. 아빠는 할머니를 모시고 2박3일 남해 여행을 다녀왔다. 할머니는 너가 태어나기를 고대하셨고, 너가 태어나고 나서도 매일 영상통화로 너를 볼 만큼 너를 좋아하셨다.
너가 태어나기 한 달을 앞두고, 엄마는 출산휴가에 돌입했고 엄마와 아빠는 부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 송파구 집으로 돌아왔다.
너가 태어날 무렵
아빠는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엄마는 집에서 쉬면서 너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임산부에게 산책이 좋다고 해서 주말이면 가까운 공원이나 서울 근교로 자주 나갔다.
아빠는 틈만 나면 엄마의 배를 붙잡고 너에게 말을 건넸고 그게 아빠가 한 태교의 전부였다.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엄마의 뱃속에 있던 네가 열심히 태동을 할 때, 아빠는 정말 신기했다. 아빠 목소리, 잘 들렸니?
엄마의 배가 많이 불렀을 때라 태교 여행은 가지 못했다. 엄마는 여행 대신 일을 선택했다. 정말 만삭이 될 때까지 책임감 있게 일 했다.
양재동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 가서 만삭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너가 태어날 때
출산예정일이 다가와도 너는 엄마 뱃속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예정일을 넘기려나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정일을 이틀 앞두고 엄마가 진통이 오는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엄마는 이게 가짜 진통일 거라면서 병원에 가봤자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새벽을 보내고 아빠는 걱정되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사무실에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시로 엄마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퇴근하면서 수제햄버거를 사서 갔고, 이게 엄마가 너를 낳기 전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 (그래서 너가 이렇게 햄버거를 좋아하게 된 걸까?)
너가 태어나던 날 새벽, 엄마는 참지 못할 정도로 아프니 바로 병원으로 가자고 했고 아빠는 살금살금 운전하여 병원으로 갔다.
새벽이라서 병원은 조용했다. 입원을 마치고 엄마는 누워있고 아빠는 엄마 곁에 있었다.
아침에 이모가 병원으로 왔다. 안절부절 못하는 아빠를 안심시켜주었다.
오후 2시 정각이 되자마자 마침내 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들어가서 직접 탯줄을 잘랐다. 지쳐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그날 저녁,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너와 엄마를 보기 위해 병원으로 오셨다. 면회시간에 맞춰서 오신 덕분에 갓 태어난 네가 고개를 돌리는 것까지 보실 수 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엄마는 회복을 하면서 너에게 모유를 먹이기 위해서 수유를 하러 갔다. 아빠는 너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이 잘 안 났고, 면회시간 때마다 1등으로 가서 유리벽에 얼굴을 붙이고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너의 얼굴을 신비롭게 바라보았다.
면회시간이 끝나고 입원실로 돌아올 때는 아빠가 되었으니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열심히 살아야겠다, 너에게 정말 좋은 아빠가 되어야겠다, 라고 다짐 또 다짐을 하고는 했다.
아빠의 맨살 가슴에 너를 안기도 하였다. 캥거루 케어...라고 했다.
병원에서 이틀밤을 더 자고 근처 조리원으로 이동했다.
조리원에서는 2주 정도 지냈다. 아빠는 조리원에서 지내면서 출퇴근을 했고 작디 작은 너를 안아서 씻기는 법도 배웠다.
너는 옹알이가 빨랐고 얼굴 표정도 다양했다. 배가 고플 때는 매섭게 울었고, 엄마의 젖을 힘차게 빨았다.
조리원에 있을 때 대구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도 너를 보기 위해 서울에 올라오셨다.
조리원에서 신생아 촬영을 했다.
조리원을 나와서는 경기 동두천시에 있는 외가댁에 가서 지냈다. 너도 너지만 엄마도 조리를 더 해야했다.
너와 엄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쓰시던 안방을 차지하고 지냈다. 안방만 차지한 게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형, 누나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
아빠는 주중에는 집에서 지내며 출퇴근을 하고 주말에는 너와 엄마를 보러 동두천으로 갔다.
너가 동두천에 있는 동안 50일 촬영을 했고 생후 70일쯤에는 대구도 다녀왔다. 그 뒤로 다시 동두천에서 생후 100일 무렵까지 지냈다.
모유를 먹었고 분유도 먹었다. 엄마와 아빠는 자다가도 너가 울면 일어나서 젖을 먹이고 했다.
너가 태어났을 때, 가족들과 엄마의 친구들, 아빠의 친구들이 많은 선물을 했다. 우성이형의 옷과 장난감을 물려받기도 했다.
대통령 탄핵.
오키나와 여행. 괌 여행. 제주도 여행.
이유식.
대방동 이사.
엄마의 복직.
다시 동두천으로. 3개월 간 어린이집. 외할머니. 이모.
다시 대방동.
주말마다 동두천엘 방문했다. 외할머니께서 너가 먹을 반찬을 마련해주셨다. 너는 콩나물, 숙주나물, 호박나물 같은 나물 무친 것을 잘 먹었다. 외할머니가 소고기무국, 시래기된장국도 해다주셨다.
직장어린이집 만1세만에 들어갔다. 선생님 다섯 분에 너를 포함하여 15명이 한 반이었다. 3월 한 달 동안 적응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엄마는 다시 시작하는 직장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대방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부천 송내역까지 다녔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왔다. 결국 너의 적응은 아빠의 몫이었고, 아빠는 직장에 양해를 구해야 했고...
너가 세상에 나오고 두 돌이 될 때까지 실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엄마는 1년 정도 육아휴직을 하고 너를 돌보았고, 엄마가 복직한 직후 3개월 간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모가 너를 돌봐주셨다. 물론 그때 엄마와 아빠는 매주 금요일 저녁에 동두천으로 가서 일요일 저녁까지 지내면서 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말이다.
아버지의 직장 동료들도 상황을 이해해주고 배려해주셨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