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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정말로 다른 행성에서 왔다

또는 우리는 서로 다른 우주에 살고 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줄여서 ‘화남금녀’), 이 책을 요즘도 많이 읽는지 모르겠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책이었다.


이 책의 몇 부분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남자들은 사건이 터지면 자신의 동굴에 숨는 습성이 있다. 그건 도망가는 게 아니고 남자들의 습성이니 이해해줘라, 따위.


신기한 건 이 책의 결론이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행성에서 왔어. 그래서..., 뭐?)


men-are-from-mars-women-are-from-venus.jpg 정말 다른 서로를 이해해보자는 취지...였던 것으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떠나서 바로 어제 아내와 내가 정말 서로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걸 실감하는 일이 있었다. 위 책의 결론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글의 결론은 명확하다: “아내와 나 - 우리는 정말 다르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걸 잊지 말자.”


어제 우리는 몇 년 만에 특정 장소에 재방문 했다. 놀이공원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부부였고 함께였다. 편의상 첫번째 방문을 A사건, 어제의 방문을 B사건으로 부르자.


어제 B사건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A사건에 대한 나와 아내의 기억, 그리고 평가가 서로 다른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A사건에 대해 정말 재밌고 좋았고 행복했던 기억만 있다. 웃고, 서로 안고, 장난치던 몇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어제 즉흥적으로 재방문을 계획했던 것도 있다. 이번에도 좋은 기억을 갖게 될 거란 확신이 있었다.


반면, 아내는 A사건이 물론 재밌고 좋았고 행복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특정 어트랙션에 입장하기 위해 1시간 가까이 줄을 선 일이었다고 했다. 그 대기줄이 너무 길어서 오래 기다려야 했고 그게 정말 힘들었다고. 이게 핵심 기억이었다.


사람마다 기억하는 포인트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극명하게 차이가 날 줄이야.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난 되물었다: “그럼 A사건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거네?” 아니. 그건 또 아니란다. 정말 좋았고 행복했지만, 불편하고 힘들었던 게 강렬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question-2736480_1920.jpg 음...??? 그랬구나...


더 재밌는 건 이 차이가 B사건에 대한 준비 및 진행 과정에서 서로 다른 행동으로 표현되었단 점이다. 나는 A사건에 대해 정말 만족스러웠고 개선점을 느끼지 못했기에 B사건에 대해 별 준비가 없어도 된다는 입장이었다. 일단 가기로 했으니 가면 되고, 가서 재밌게 놀면 되겠지...


반면, 아내는 A사건 때 힘들었던 부분을 어떻게든 개선하려고 서둘렀다. 일찍 출발하는 건 물론이고, 줄을 서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미리 예매해서 불편했던 경험을 최소화한달지 하는 등의 준비였다. 어차피 갈 거 이왕이면 좀 더 편하게 놀 수 있으면 더 좋지...


이런 차이 때문에 어제 B사건을 준비하며 잠시 잠깐 의사소통이 어렵고 버벅이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가 서로를 보며 '아니, 대체, 왜...?' 하는 순간이 몇 번 스쳐갔던 것이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나는 지나간 일들에 대해선 어지간하면 미화해서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절대적으로 그런지는 모르겠고 아내에 비하여 그런 경향이 짙은 사람이었다. 나는 A사건 때 줄 서느라 힘들었던 일은 아내가 말하기 전까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coffee-3449802_1920.jpg


나는 아내가 나에 비해 걱정이 조금 더 많은 타입의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아내의 행동에 이런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아내를 좀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어제 오랜만에 가족 모두 놀이공원에 다녀온 것도 좋았지만, 이 대화를 통해 아내와 나 사이의 차이점을 더 또렷하게 인식하게 된 것도 좋았다. 우린 정말 서로 다르구나. 다르기 때문에 더 자주 더 나은 방식으로 대화하고 소통해야겠구나.


꼭 화성과 금성이 아니라도 우리는 서로 다른 행성에서 왔고 어쩌면 지금도 서로 다른 우주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간극을 좁혀줄 수 있는 건 마음이 열려 있는 상태에서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방법 뿐. 여전히 대화는 우리의 힘이고, 다름은 재앙이자 곧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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