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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chpapa Jan 16. 2022

토요일에는 미술을 하자

제목 짓기 참 어렵다

글쓰기는 상처를 드러낸다고 한다. 상처, 상처, 상처... 


오늘 아이들과 집에서 미술놀이(?)를 했다. 이름하여 아트 새터데이 Art Saturday


지난 주에 만난 분께서 따님과 함께 자주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큰 캔버스를 구해서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고 한다. 보여주신 작품들이 하나 같이 근사했다. 그걸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


사실 나는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었다. 만약 아이들이 화가가 되겠다고 하면, 우리 집안은 대대로 그런 예술적 재능이 없었고, 뛰어난 재능이 없다면 유명해지기 어렵고, 유명해지지 않는다면 생계가 힘들 수도 있다는 말을..., 적어도 아빠인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 우와, 화가가 되겠다고? 

- 그림 그리는 걸, 표현하는 걸 정말 좋아하니? 

- 그럼, 해 봐. 하다보면 알게 되겠지, 그게 무엇이든. 

- 왜냐하면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거니까...


그렇게 믿는데 왜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려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지 않는데 어떻게 누구나 무엇이든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큰 캔버스에 무언가를 그려 넣고 칠하는 건 화가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했던 건 아닐까. 

'화가'라는 선택지를 아빠인 내 선에서 이미 지워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꼭 직업적인 연관성을 갖지 않더라도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잖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순 있잖아.


더 미루지 말고 당장 이번 토요일에 해보기로 했다. 활동에 필요한 물품은 아내가 구매했다. 거실 한쪽 벽과 바닥에 비닐을 붙이고 이젤을 세우고 물감을 짜고...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준비를 해줬다. 그 이후로 아이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리고 섞고 칠하고 놀았다.



아내와 나도 바닥에 앉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빈 캔버스를 마주 하니 처음엔 두려웠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색을 이것저것 칠해보기로 했다. 아내도 나도 무척 즐겁게 몰입했다.


나는 우울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왜 우울했냐고? 모르겠다. 그런데 우울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우울함 속에도 작은 희망이 샘솟고 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내 마음이 딱 그랬다.


글쓰기는 상처를 드러낸다고 한다. 나에게도 상처가 있다.


아마도 우리가 자라면서 최초의 폭력을 경험하는 건 부모로부터일 것이다.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넓은 의미의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 미안하다.


내가 기억하는 폭력적인 순간은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종교 관련 물품을 아버지가 있는대로 벽으로 집어 던지면서 박살을 내던 때였다. 기억이 흐릿해서 어둡게 느껴질 정도이고, 실제 상황이었는지조차도 확신이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마치 어릴 적 기억처럼 남아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당시의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현실이어서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일 거라고 의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정말 잘 모르겠다.


어머니에게는 종교가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실은 아버지도 엄청나게 미신적인 분이신데, 어머니의 미신스러운 그 종교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병적으로 싫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오히려 매우 종교적이었다.


어렸던 나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싫다는 걸 왜 자꾸 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어머니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 걸 왜 저렇게 싫어하는 것일까.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로선 어머니의 사정이 좀 더 이해가 간다. 어머니는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아버지나 누나 그리고 내가 채워줄 수 없는 공허함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대체, 왜? 지금에사 아버지께 따져 묻기도 쉽지 않다.


그 뒤로도 어머니의 종교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숨겨졌을 뿐이다. 누나와 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종교 활동에 참가할 때도 있었다. 나는 공범이 되는 것 같아 불편했지만, 그리고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숨겼다. 숨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아프시자 아버지는 혹시나 어머니가 그 좋아하는 종교 활동을 하면 좀 나아지실까 싶어 집에 제단을 꾸며주시기도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약 1년 전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그간 어머니가 종교 활동을 숨겼다는 걸 뒤늦게 아셨다며 그 오랜 기간 어머니가 아버지를 속였던 것에 대해 약간의 분함과 약간의 회한이 섞인 감정을 표현하신 적이 있다.


아들인 나는 아버지도 딱했고 돌아가신 어머니도 딱했다. 내가 안타까운 지점은 아버지의 그것과 약간 다르긴 하다. 두 분이서 충분히 현명하게 해결하실 수 있는 문제인데 그걸 이런 방식으로 마무리 하게 된 것이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바로잡을 기회가 사라진 것이 안타까웠다.


나의 아이들은 훗날 나와 아내를 어떻게 기억할까. 대단치 않은 문제로는 다투지 않았고, 대단한 문제에는 서로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쳐서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기억해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살 것이다.


글쓰기에 정답이 있을까. 좋은 글과 나쁜 글은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좋은 글일까. 이제 그런 고민은 않고 쓰기로 했다. 고민할 시간에 쓰는 게 낫다. 쓸 시간도 부족하다.


이 글은 나만 쓸 수 있는 글이다. 그래서 썼다. 글쓰기는 상처를 드러낸다고 한다. 이건 나의 상처일까.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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