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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박세희 Jan 21. 2022

매일 새벽, 현관 옆 방

글을 쓰는 시공간

제목과 첫 문장은 섹시하게 써야 한다는 데, 그걸 매만질 겨를도 없이 쓴다.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은 다들 학창시절에 백일장으로 상을 타봤다는 식으로 자기소개를 한다. 그 소개를 듣는 다른 이들의 한결같이 그래, 나도 그랬지, 하는 얼굴이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이런 기억은 있다. 백일장이 끝나고 다른 일로 교무실에 갔다. 제출된 작품 앞에 모여든 선생님들이 이번 백일장 최우수상은 이 작품이야 하며 다른 친구가 낸 원고지를 펄럭였다.


저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무슨 용기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 그래 한 번 봐. 고작 초등학생이었던 내 눈에도 사고와 문장은 신선했다. 와,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 그 친구는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연락을 주고 받으며 지내지만, 그의 문재를 시샘했다는 게 부끄러워 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은 없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있었지만, 역시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쓰기를 등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렸다. 이제 더는 습작을 미룰 핑계가 없게 되었다. 이대로 죽든가 아니면 좋은 글이 아니지만 일단 쓰든가, 의 선택지만 남았다.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한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공간'있다고 해결된 게 아니더라. 아직 눈과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 또는 아이들과 같이 누웠다가 홀로 미끄러지듯 방을 빠져 나온 이 새벽. 자기만의 '시간'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귀는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향하게 된다. 아직 기저귀를 떼지 못한 둘째가 잠투정을 하다 깨면 어쩌나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곧 날이 밝고 아침이 된다. 내가 페이스북이고 트위터고 어디에든 공유하면 적어도 누군가는 이 글을 읽겠지, 반응이 있을까 없을까, 알 수 없는 그 설렘으로 가슴이 들뜬다.


올해 두 번째 책으로 어딘글방의 어딘(김현아)가 쓴 ⟪활활발발 – 담대하고 총명한 여자들이 협동과 경쟁과 연대의 시간을 쌓는 곳, 어딘글방⟫을 읽었다(책을 읽고 남긴 메모). 


어딘은 이렇게 쓴다: "글을 쓰게 하는 본연의 힘은 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느냐, 그것도 얼마나 절실하게, 얼마나 혹독하게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아래의 예시를 든다:


박완서 작가는 마흔에 등단했다. 스무 살에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전쟁이 터지는 통에 간난신고를 겪어야 했고 먹고살기 위해 온갖 일을 닥치는 대로 해야만 했다. (...)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박완서 작가는 그 이야기를 쓰고 싶었을 것이다. (...) 헛구역질처럼 문장이 쏟아져 나와 참을 수 없을 때 마침내 펜을 들어 액체 상태의 이야기를 어떤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다.


오정희 작가도 그랬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에 비로소, 쓰기 시작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배수아 작가도 그랬다. 아침 9시에 병무청으로 출근해 7급 공무원으로 일을 하다 5시에 퇴근해 집으로 돌아와서 요플레에 밥을 말아 먹고 글을 썼다.

카프카도 그랬고 위화도 그랬다. 카프카는 노동보험공단에서 일했고 위화는 치과에서 발치사로 일했다. 5년 동안 1만 개가 넘는 이를 뽑으며 위화는 여기저기 문학잡지에 소설을 써서 보냈다.


"참을 수가 없도록 하고 싶은 이야기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동의한다.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나에게는 참을 수가 없도록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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