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이 나의 자아에 미치는 영향’
한 달 전에 운동화를 샀다. 신던 것이 헐어서 새로 샀는데, 마침 6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시기와 맞물리면서 퇴사 기념 쇼핑 같이 되었다. 새 신을 신고 새 회사로.
그런데 며칠 전부터 이 새 운동화를 신고 걸으면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쓸리는 듯 불편했다. 양발의 크기가 꼭 같지는 않으니, 신을 살 때는 조금이라도 큰 쪽 발에 맞추라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허나 나는 왼발이 조금 더 큰데, 왜 오른발이 아플까. 발 크기도 나이를 먹으면 변하는 거였나.
가던 길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운동화 안쪽을 살폈다. 눈에 뭐가 보이지도 않고, 손에 뭐가 만져지지도 않았다. 털어도 나오는 게 없었다.
양말 때문이려나. 신발이 아니라면 양말 때문일 거란 추론은 글을 쓰는 지금에야 자명해보이지만, 그때는 그 발상을 해낸 스스로가 기특했다. 신고 있던 양말을 까뒤집으니 안쪽 봉제선 마감 부분 매듭이 뭉툭하게 튀어나온 게 보였다. 손으로 잡고 뜯을 수도 있었지만 참고 사무실까지 가서 사무용 가위로 잘라냈다.
첫 마라톤 완주 때 런닝셔츠 같이 생긴 싱글렛을 입지 않은 걸 젖바퀴에 피가 나도록 후회했다. 실제로 젖바퀴와 젖꼭지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같이 옷과 살이, 살과 살이 닿는 부위에 죄 피가 났다. 달려서 힘든 것보다 쓸려서 따가운 괴로움이 더 컸다. 통풍이 잘 되게 생긴 그 내의에 ‘런닝’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가 있었다.
나는 아이들 내복을 사면 첫 빨래를 하기 전에 옷을 뒤집어 안쪽에 붙은 꼬리표부터 뗀다. 거실 바닥에 앉아 가위를 들고 살살 조심스레 제거한다. 아내는 그런 거 대충 해도 되지 않냐고 묻지만, 가끔 상의를 거꾸로 입고도 목 부분이 답답하지 않아서 전혀 몰랐다고 하고, 세탁소에서 박은 스테이플러심이 옷에 그대로 달려 있어도 아랑곳 않고 다니는 귀여운 사람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그냥, 재밌잖아, 하고 만다.
어제가 있었고 오늘이 있다고 내일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해가 갈수록 그게 실감이 난다. 그래서 애매한 기대는 차츰 접게 된다. 대신 살뜰한 기쁨을 차곡차곡 쌓는 선택을 한다. 갑작스럽게 나의 내일을 빼앗긴다 해도 괜찮다. 튀어나온 실밥이고 어긋난 매듭이고 세탁소에서 박아놓은 스테이플러심이고 실은 어제 다 정리를 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