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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를 보았을까

LA-샌디에고 여행

5월 초 연휴를 틈타 미국 서부에 다녀왔다. 그 짧은 시간에 아무 준비도 없이? 그랬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샌디에고에서 살고 있던 친구 가족. 아이들 나이대도 비슷하니 한 번 놀러오라는 어쩌면 그냥 던진 말에 정말 갈까 해서 여행이 성사 되었다.


유일한 걱정은 둘째 아들이 아직 어린데 장거리 비행을 견딜 수 있을까. 시차에 적응할 수 있을까. 결론은 힘들었지만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니었다. 도착해서 첫 날은 내내 잠만 자긴 했다. 그러게 비행기에서 잠을 좀 자두라니까 그렇게 신나게 놀더라니.


LA로 입국해서 바로 샌디에고. 친구집에 짐을 풀고 그날은 편하게 쉬었다. 친구 가족의 환대. 아이들은 만난 순간부터 친구가 되어 같이 놀고... 바로 다음 날부터 애니스 캐년, 레고랜드, USS 미드웨이, 씨월드, 샌디에고 동물원, 델 마르 비치까지 소화하고 LA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친구 가족이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지 기록을 하자면 끝이 없다. 연간 회원권으로 나오는 초대권으로 입장권 끊어주고 주차 바우처도 주고 도시락과 간식도 준비해주고... LA와서의 일정에 대한 아이디어도 주었다. 이런 환대를 어떻게 보은해야 할지... 감사한 마음을 담아둔다.


LA로 돌아올 때즈음부터 첫째 아들이 벌새 타령을 한다. 발단은 아이들이 잘 때 샌디에고 친구집 근처 공원에서 내가 벌새를 본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첫째 아들이 학교 방과후수업 때 벌새에 관해 배웠다며 벌새는 한국에선 볼 수가 없고 미국 서부에서만(?) 볼 수 있다고 꼭 벌새를 봐야겠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미 우리는 LA 대도시의 평일 저녁 교통체증에 갇혀버렸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일정은 LA 그리피스 천문대에 가서 일몰과 야경을 구경하고 숙소 귀환이었다는 것. 이 사실을 안 첫째는 울먹임을 멈추지 않았고, 잠깐 피자 테이크아웃을 하러 아내가 차에서 내린 틈을 타 나는 빠르게 검색을 시작했다.


LA, Humming Bird 이렇게 검색했더니 Kenneth Hahn Hummingbird Garden이란 지명이 나온다. 심지어 당시 위치에서 멀지도 않았다. 하지만 숙소 방향과 반대. 다시 말해 그리피스 천문대와 이 허밍버드 가든을 둘 다 갈 순 없단 뜻이었다. 방문 후기도 살펴본다. 벌새를 볼 수 있는 건 확실했다.


뜨끈뜨끈한 피자를 들고 조수석에 오른 아내에게 물었다. 그리피스 천문대는 가지 말고 허밍버드 가든을 갈까? 잠깐 살펴 본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첫째 아이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가만, 그리피스 천문대가 산 꼭대기에 있고, 산에는 꽃과 나무가 있고, 꽃과 나무가 있으면 벌새가 있지도 않을까.


예전에 그리피스 천문대에 갔을 때 내가 벌새를 봤던가. 그랬던가. 기억이 가물했다. 아마 봤어도 벌새인 줄 몰랐겠지. 사람의 인지 능력과 기억력이란 원래가 그런 것이지. 그래도 희망을 담아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거기 산이야. 그래서 꽃도 나무도 많아. 벌새가 있을지도 몰라. 희망을 버리지 말자.


가는 길에 알았다. 아, 월요일엔 그리피스 천문대가 휴관이구나. 그래도 멋지니까 가보자. 도착했더니 주차 기계가 고장이 났다네? 주차비를 아꼈다. 행운이 +1 적립되었다. 아이들 특히 첫째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울상이다. 그게 그때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IMG_5997.jpg 엄마 아빠만 신났고 아이들은...


그래서 우리는 LA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벌새를 봤을까. 아빠는 결국 거짓말쟁이가 되었을까. 역시 헛된 희망은 품지 않는 게 나았을까. 그렇게 우리의 미국 서부 여행은 짧고도 우울한 상태로 마감을 했을까. 얼른 결말을 공개하고 싶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첫째 아이에게 벌새는 무엇이었을까. 여행 시작도 아니고 끝 무렵에 갑자기 벌새에 꽂혀서는 미국을 뜨기 전에 꼭 벌새를 보고야 말겠다고 하는 그 갑작스런 꼬장은 대체 무엇에 기인했을까. 벌새를 보는 게 아이에게는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모든 게 다 편했던 샌디에고와 달리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낯설고 준비도 안 되어서 헤매고 고생했던 LA. 나는 그 LA에서의 1박 2일이 많이 생각난다. 사실 미국 도착 첫날에도 우리는 게티센터를 가겠노라며 햄버거까지 사서 차를 몰았지만, 아이들이 깊은 잠에 빠지는 바람에 게티센터 주차장에서만 머물렀었다.


정원이 잘 갖추어진 게티센터엔 분명 벌새가 있었을텐데. 그럼 여행 첫날에 우린 벌새를 볼 수 있었겠지. 그리고 여행 내내 첫째 아이는 벌새를 또 볼 수 있겠냐며 기대에 부풀었었겠지. 그렇게 이번 여행의 아이콘은 어쩔 수 없이 벌새가 되었다. 빠른 날갯짓으로 정지비행이 가능하고, 그걸 위해 많은 꿀을 먹어야 하는 벌새.


이번 여행이 벌새로 기억되는 데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짧은 일정을 만회하고자 부지런히 움직였고 그 와중에 친구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개인적으로는 새벽에 일어나 운동도 하고 독서도 했던 그런 여행이었다. 벌새를 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지금은 그게 궁금하다. 이번 여행이 남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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