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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박세희 Nov 06. 2018

자아가 생겼다 = 존중받기를 원한다

관계가 우선이고, 훈육은 다음이다.

이전 글에서 “아이와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느낌이 든다면 다시 쌓아 올려야 한다”라고 썼다. “무너졌다”, 라는 표현이 조금 과하다 싶기도 하지만, 당시 내가 받은 느낌은 딱 그랬다. 총총이가 유독 나에게만 반사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고, 그걸 보는 내 마음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기에, 저런 표현이 튀어나왔다.


아빠와 아들. 혈연이라고 하지만 생판 남에 비해 약간 유리한 점이 있을 뿐. 관계 형성/유지의 기본 원리는 다른 인간관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약간의 유리한 점 때문에 정작 이 중요한 사실을 잊는다. 나는 아빠(그리고 어른)이니까. 아빠(그리고 어른)이라서. 아이에게 대놓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맞다. 그건 착각이다.


아이를 아이로 대한다는 것.
아이를 아이로 바라본다는 것.


‘아이를 아이로 대한다’, ‘아이를 아이로 바라본다’는 것은 아이라고 낮추어 봐도 된다거나 아이의 의견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아이를 아이로 대하고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는 것이다. 아이가 좋고 싫음을 구별하고 자기 의견을 강하게 표출하기 시작하는 때, 흔히들 자아가 생겼다, 라고 말하는 시기가 되면 아이는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의 말은 절대 듣지 않으려 한다.


다시 한번. 아이의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면 무엇이든 막무가내로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잠깐 된 것 같아 보이는 때도 있겠지만 그건 잠깐일 뿐이다. 바로 풀린다. 내 경험담이다. 나는 막무가내로 한 번 해봤다. 시간이 부족해서, 늦을 것 같아서, 마음이 급해서, 막무가내로 했다. 싫다는 걸 억지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안아서 차에 태우고…, 그렇게 했다. 그게 몇 번 반복되자, 총총이는 나를 보면 반사적으로 피했다.


퇴근하고 어린이집에 총총이를 데리러 가면 문에 달린 원형 창으로 나를 발견하고 “아빠~” 외치며 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총총이였다. 그렇게 달려온 총총이를 두 팔로 안아 올리는 게 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랬던 총총이가 어떤 날은 나를 보고도 못 본 척 고개를 휙 돌렸다. 아빠 오셨네? 집에 갈 준비해야지~”, 하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딴청을 피웠다. 급기야 제자리에 서서 엉엉 울었다. 안 갈래. 집에 안 갈 거야.


총총이와 나 사이에 벽 하나가 세워진 느낌.
서로의 말과 뜻을 다시 튕겨내는 단단한 벽.


그건,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건물이 떠나가라 엉엉 울며 발을 쾅쾅 구르는 총총이를 힘겹게 안고 억지로 차에 태워 어찌어찌 집까지 왔건만, 이제는 차에서 내리려 하지 않았다. 아빠, 문 닫아. 저리 가. 그렇게 주차장에서만 몇 십분.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백기투항. 항복. 졌습니다. 아빠가 졌다, 총총아. 아빠가 잘못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그 말을 이렇게 빨리 체감하게 될 줄이야.


그 일을 겪은 다음에 쓴 글(이자 반성문)이 바로, 아이와의 관계 — 무너졌다는 느낌이 들면 다시 쌓아야죠」(2018.10.29.)였다: https://brunch.co.kr/@chchpapa/81


관계 회복의 실마리는 ‘놀이’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내와 총총이가 함께 노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 뒤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돌이켜보니 최근 총총이와 나 사이에 ‘놀이’가 생략되어 있었다. 집에 돌아와 피곤하다는 이유로, 일찍 자야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다는 핑계로, 총총이와의 놀이를 건너뛰고 나의 요구만 들이댔다. 그게 쌓이고 쌓여서 결국 폭발. 그러니 총총이와 충분히 놀이를 하는 것이 관계 회복의 첫 단추일 것이다. 이게 내가 세운 가설이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하원하고 같이 놀았다. 취침이 조금 늦어질지언정 함께 놀았다. 노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고 나도 총총이처럼 걱정을 내려놓고 놀았다. 노는 시늉만 할 때는 바로 알아채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점토든 블럭이든 피규어든 총총이와 같은 놀잇감을 손에 들고 진지하게 놀이에 임했다. 놀이에 한껏 몰입한 총총이 옆에서 총총이 눈높이에 맞게 착 엎드려서는, 아빠가 너랑 놀고 싶다, 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달했다.


놀이를 총총이가 주도할 수 있도록 했다. 먼저 개입하지 않고 따르는 마음으로 끈덕지게 기다렸다. 이건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예전에 내게 한 번 알려주신 방법이었다. 보호자가 먼저 제안하거나 제시하지 말고 아이가 주도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가 아주 약간의 반응과 동조만 하면서 따라주는 방식으로 놀이를 함께 하는 것이다. 오, 그랬어?”, 오, 그랬구나!이렇게 말이다. 단, 제대로 할 것. 반응하는 ‘척’, 동조하는 ‘척’만 말고, 제대로.


놀이가 곧 교육이자 소통이다.
놀이는 아이의 삶 그 자체이다.


놀랍게도 단 하루 만에 반응이 있었다. 아빠와는 목욕을 하지 않겠다며 며칠째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날은 놀이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아빠와 함께 목욕을 했다. 씻기는 과정도 순탄했다. 잠도 푹 잤고, 다음날 아침 등원 준비도 수월했다. 즉각 반응이 오는 것이 신기했다.


당연히 둘째날도 같은 방식으로 놀았다. 퇴근하고 하원하고 집에 돌아와서 이런저런 할 일이 있었지만 만사 제쳐두고 놀았다. 자주 웃었고, 깊이 웃었다. 총총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에 얹혀 있던 짐들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나의 근심, 걱정이 저 멀리 허공으로 흩어져버리는 듯했다. 그 후련한 느낌, 아실랑가.


아내에게 얘기했다. 열심히 놀아줬더니 반응이 좀 있는 것 같아, 여보. 아니나 다를까, 그다음 날 아침 어린이집 등원 준비도 정말 수월했고 어린이집에 도착해서도 씩씩하게 입장했다. 그날 아침 어린이집을 나와 사무실로 이동하면서 아내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나 지금 정말 행복해. 이제야 살 것 같아. 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총총이의 맑은 웃음소리에
그간의 답답함이 뻥 뚫린 듯 마음이 후련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버릇이 나빠질까봐 걱정한다. 나도 걱정이다. 그런데 대체 아이의 버릇은 어떻게 나빠지는 걸까. 나도 궁금하다. 그렇지만 아이와의 관계가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아이의 버릇이 좋고 나쁘고가 문제가 아니게 된다. 대화를 전면 거부하는 아이 앞에서 훈육은 무슨 훈육. 내가, 총총아~, 하고 부르기가 무섭게, 아니야, 아니, 안 해요, 저리 가, 라고 말하는 총총이를 대체 무슨 수로 가르친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다른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찾은 방법은 먼저 수용하는 것이었다. 총총이의 욕구와 요구를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게 충분하고 진실되면 총총이도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만 2세 아이에게, 아빠는 어른이니까 대접해드려야지, 와 같은 사회적 관념이 갖추어져 있을리 만무하다. 주는 대로 받고, 받는 대로 준다. 철저하다. 계산적인 게 아니고, 본능적인 것이고 솔직한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해하기 쉽고 명쾌하다.


관계가 우선이다. 훈육은 다음이다. 관계가 굳건하고, 그 바탕에서 어른이 먼저 좋은 모습을 보이면, 아이는 그걸 보고 배우고 익힐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 이상 좋은 훈육법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아이에게는 존중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부모의 존중이 필요하다. 부모가 아이의 말을 먼저 들어주고 따라주면, 아이도 부모의 말을 들어주고 따라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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