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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chpapa 총총파파 Nov 11. 2018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 오늘이 고맙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땐 또 그때의 최선으로 살아가면 되겠죠.

작년 이맘때. 아내는 복직을 앞두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앞으로의 총총이 보육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어린 자녀를 가진 모든 부부, 특히 맞벌이 부부들의 고민일 것이다. 집 주변 어린이집을 알아봤지만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운 좋게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아내의 복직과 어린이집 입소 사이에 2~3개월 정도 빈틈이 발생해서 별도의 대책이 필요하기도 했다.


만약 총총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고민이었다. 총총이를 처가에 맡기고 주말에 가서 보는 안, 내가 휴직을 하고 육아를 전담하는 안, 베이비시터를 구하는 안 등 여러 방안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내와 대화를 거듭하면서 몇 가지 원칙에 합의했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결정한다.”, “엄마 아빠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엄마 아빠 각자의 일 역시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 보육은 전적으로 우리 부부의 몫. 다른 가족의 도움은 최소화하고 우리 선에서 해결한다.” 등등.


(c) pixabay


결과적으로 총총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luckily), 그에 따라 여러 조각이 딱딱 맞춰지면서 현재와 같은 그림이 되었다. 만약 이 어린이집이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총총이가 우리와 함께 살 수 있었을까. 어떻게든 함께 사는 방향으로 방법을 마련했겠지만, 지금까지 거쳐온 길보다는 훨씬 험난했을 것이다.


원칙이 아예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조건과 상황이 간단치 않다 보니 여러 원칙이 뒤섞이기도 한다. 원칙들의 중요도를 고려하여 조화롭게 정렬할 필요가 있다. 가치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나의 경우 최우선 원칙은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그래야 부모도 아이도 행복할 수 있다.)였다. 나는 그것을 위하여 ‘엄마와 아빠의 일’ 가운데 ‘아빠의 일’을 후순위로 내릴 각오가 되어있었다.


나는 어쩌다 그런 원칙을 갖게 된 것일까? 대학 입학 전까지 가족과 함께 살면서 특별히 행복한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물론 특별히 불행했다고 기억하지도 않는다.) 가족은 꼭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인가? 가족이란 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어느 책에서 읽은, 내가 참 좋아하는, 가족에 대한 설명이 있다. 가족이란 “억지로 묶인 사람들이므로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해하려고는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약간은 행복해질 것이다.”(도다 세이지, ⟪몇 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


억지로 묶인 사람들이 굳이 함께 살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공통의 언어를 만들고, 또 서로를 이해하는 바탕을 만들 수 있을까.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 방법을 실행하려면 그동안 생략한 시간/에너지의 두 배 세 배 이상의 공력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인식을 갖고 있었다.


(c) pixabay


때마침 읽었던 서천석 선생님(소아정신과 전문의)의 글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직장 문제로 아이와 떨어져 살았고 이제는 아이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한 어머니의 케이스를 소개하면서 쓰신 글이었다. 내 주위에도 여러 이유로 그렇게 살고 있는 가족들이 적지 않다.


(잠깐. 나는 그들을 비난하고자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가정마다 가치와 원칙이 다르고 선택이 다르다.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떠한 결과를 좋게 혹은 나쁘게 평가하는 그 기준 또한 사람마다 가정마다 다르다. 외려, 나는 가정 내부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사회적으로 함께 짊어지는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육아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지만, 아이 돌봄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오늘날 낮은 출생률의 한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이와 떨어져 살고 난 뒤 아이와의 관계에서의 어려움은 어찌보면 피하기 어려운 결과일 것이다. 그 어려움을 예상하고 어떻게든 해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서천석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나는 몇몇 아버지들을 떠올렸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라는 원칙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나에게 심어주신 분들이다. 이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한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유럽 어느 나라로 유학을 갔다. 한국 교육에 답답함을 느끼던 아이는 그 나라 교육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성과도 있었다. 여기서 교육을 받으면 장차 더 잘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학이 마쳐질 때쯤 아이는 아버지에게 나 혼자라도 여기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버지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이가 아직 어리기도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 경제적 부담 등 현실적인 어려움을 그럴 듯한 말로 돌려서 표현하신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는 않는다.


또 한 아버지가 있다. 평생 글을 써서 가족을 부양하고 틈틈이 시를 쓰며 작가의 꿈을 꾸는 낭만적인 문학청년 아버지였다.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낙향을 선언하셨다. 진즉 어딘가로 내려가 자연의 풍광을 렌즈에 그리고 원고지에 담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 꿈을 참고 참으며 묵묵히 가족들, 특히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덧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고, 대학에도 입학했다. 사회가 말하는 아버지로서 양육 의무는 거진 다 하였다. 그러니 이제는 나도 내 삶을 찾아서 서울을 떠나 남도로 내려가겠다.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감함 이면에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30년 가까이 자신의 꿈을 유예한 그 인내심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비롯한 이 땅의 아버지들 그리고 어머니들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맨손으로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셨다. 덕분에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나는 함께 살았고, 빽빽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어릴 적에는 가족이 한 집에 함께 사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고만 생각했기에 특별히 그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그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밤낮 애쓰는 부모님의 고생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을 지켜낸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한다. 감사하다. 그것은 결코 당연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니었다.


(c) pixabay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다. 이런 사정, 저런 사정이 생긴다. 떨어져 살기 싫어도 잠시 또는 길게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아야 하는 시기가 있을 수 있다. 당장 아내와 나도 내년부터는 지금처럼 함께 살 수 있을지 어떨지 알지 못한다. 아내가 만약 집에서 통근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발령난다면, 총총이는 주중에는 엄마의 얼굴을 보기가 어렵게 된다. 주말에 일이 생기는 경우도 있으니 2~3주 만에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엄마와 일시적으로 떨어져 사는 경험이 총총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다행인 것은 겉으론 연약해보이는 아이들이 실은 정말로 강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품고 있다. 나는 마치 식물과 같이 빛을 향해 자라나는 아이 고유의 내재된 힘을 믿는다. 그래서 큰 걱정하지 않는다. 괜찮을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올해까지 부모와 함께 살며 차곡차곡 쌓은 시간들이 있으니, 그 관계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매일 출・퇴근 하며 총총이 어린이집 등・하원까지 함께 하는 일이 힘들겠다며, 어쩌다 싱글대디처럼 독박육아를 하게 되었냐며, 주위의 걱정이 적지 않다. 그런데 그건 현실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나는 이렇게라도 아내와 총총이와 함께 살 수 있는 현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그래서 총총이가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 그리고 선생님들께 항상 고맙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 가족이 함께 살고 있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우리의 원칙을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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