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즐거움
나는 책을 사랑한다. 아니, 어쩌면 내 몸속에는 종이의 DNA가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코끝을 스치는 특유의 향기, 오래된 책의 쿰쿰한 내음과 갓 인쇄된 신간의 빳빳한 냄새는 잠들었던 뇌 속의 도파민을 가차 없이 깨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들려오는 사각거리는 소리, 은은한 잉크 향 그리고 그 안에서 느리게 흐르는 시간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다 보면 어느새 나는 책과 혼연일체가 되어, 책이 선물하는 낯선 세계를 맞이한다.
치밀한 두뇌 싸움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을 선사하는 추리소설
따뜻한 성찰과 위로를 건네는 에세이
아직 가보지 못한 세계로 나를 이끄는 소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자기계발서
수백 년 전의 사람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놀랍도록 닮아 있음을 보여주는 고전문학
그리고 순수한 열정을 닮은 청소년문학까지
그 다채로운 장르 속에서 나는 수많은 스승을 만난다.
책을 읽다 보면 경이로운 문장과 단어 앞에서 자주 멈춰 선다.
이 한 줄을 완성하기까지, 작가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고민 속에서 자신과 치열하게 싸웠을지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작가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품게 된다.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달리기, 삶, 글쓰기를 모두 특별한 순간의 폭발적인 성취가 아니라, 매일 조금씩 스스로를 밀어붙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거대한 결과가 아니라, 주어진 한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조금씩 연소시키며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삶의 태도라고 말하고 있다.
한때 내 책장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빛바랜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고 삶의 무게가 조금씩 달라지면서,
소중히 간직하던 책들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헌책방으로 향하는 수레 위에 책들을 보내며 나눈 이별은 마음을 저미게 했지만,
그 아픔은 오히려 내 독서의 세계를 한층 넓혀 주었다.
책을 사는 데 따르는 현실적인 제약 앞에서 잠시 주춤하던 나에게,
동네 도서관은 새로운 시작을 허락해 준 공간이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독서가 주는 깊은 몰입과 조용한 ‘탐닉’의 기쁨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독서의 연륜이 쌓이며 책을 고르는 나의 시선은 이제 제목을 넘어 ‘작가’라는 이름에 머문다.
나를 매료시킨 작가의 신간 소식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일상으로 바꿔 주는 일과도 같다.
서점 진열대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내 마음은 설렘과 환희가 뒤섞인 흥분의 도가니로 변한다.
나는 속으로 조용한 환호를 보내며 소중하게 책을 품에 안고 새 책 냄새를 맡는다.
떨리는 손끝으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순간, 다가올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으로 온 마음이 설렘으로 물든다.
예전에는 ‘편독은 나쁘다’는 생각에 읽기 싫은 책도 숙제처럼 끝까지 붙들고 읽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글자만 의미 없이 떠도는 독서라면 과감히 책을 덮는다.
독서는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즐거움과 흥미가 뿌리내릴 때 비로소 ‘습관’이라는 꽃이 피어난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문장 속으로 온전히 빠져들 때, 독서는 단순한 읽기를 넘어 삶에 생동감을 더하는 활력이 된다.
나는 언제나 가방 속에 책 한 권을 품고 다닌다.
내게 책은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나만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복잡한 지하철 안이든 소란스러운 카페든 상관없다.
내가 책을 펴는 순간 세상의 소음은 순식간에 소거되고,
오직 작가의 목소리와 나만이 존재하는 고요한 도서관이 된다.
지난 30년이 그러했듯, 나는 앞으로도 책이라는 가장 변치 않는 친구와 함께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을 펼친다.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