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델(문가비씨)의 ‘혼외자’출산으로 나라 전체가 들썩인다. 혼외자의 아버지가 유명 배우 정우성씨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관련 뉴스로 인터넷창이 도배가 된다. 정우성씨가 10년간 사귀어온 일반인 연인이 있다느니, 공개된 스티커 사진은 또 다른 여성과 찍은 것이라느니, 인스타그램 DM(Direct Message)으로 제3의 여성에게 추파를 던졌다느니, 사실과 추측이 교묘하게 섞인 뉴스들이 대중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평소 정우성씨는 난민·정치 이슈에 적극적이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정우성씨의 언동은 해석에 따라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그가 선의로 행했을 봉사활동까지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정우성씨의 난잡한 성생활 가능성은 30여년 연예계 생활을 하며 쌓아온 선한 이미지를 일거에 무너트릴 수 있을 정도로 추잡한 것이다. 애정 없는 성관계를 하여, 한 모델을 임신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덕적인 지탄을 받을 여지가 충분하다. 지금까지 공개되고 사실로 확인된 내용만으로도, 이미 정우성씨는 다시 배우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이미지의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정우성씨의 난잡한 개인생활과 이미지 추락과는 별개로, ‘출산을 결혼으로만 책임져야하는가’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첫째, 당사자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결혼(또는 생활상의 결합)은 아이에게도 불행할 수 있다. 보도된 내용들에 따르면, 정우성씨는 문가비씨의 임신을 인지했을 때부터, 출산한 지금까지 문가비씨와 전혀 가정을 이룰 생각이 없었다. 이런 정우성씨가 문가비씨와 결혼했을 때 과연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행복하지 않은 부모 사이에서 자란 아이는 오히려, 행복한 한 사람 밑에서 양육된 아이보다 불행할 수도 있다.
둘째, 결혼만이 출산의 무조건적 종착점이 아니다. 출산과 결혼은 하나의 세트가 아니다. 삶의 모습은 너무도 다양한데, 아직 한국 사람들의 인식은 편협하다. 결혼하고 출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결혼하지 않고 출산할 수도 있다. 사회가 정해 놓은 결혼 제도 틀 안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각자 상황에 따라 행복하게 산다면 충분하다.
‘아이를 혼외자로 만들었다’, ‘난민은 받아들이자고 하며, 자신의 아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라는 비판 모두 같은 맥락의 비판이다. 정우성씨는 문가비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아이를 받아드리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가령 양육비만 지급하던 정우성씨가, 수년 후 문가비씨와 동거형태로 결합해서 살 수 도 있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 세 사람이 합의했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 또,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우성씨가 문가비씨와 합의하에 돌아가며 아이를 양육할 수도 있다. 삶은 충분히 다양할 수 있는 것이고, 결혼만이 책임감 있는 태도가 아니다.
한편, 출산을 한 문가비씨에게는 비판의 여지가 없다. 임신의 다른 당사자인 정우성씨와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임신과 출산은 온전히 문가비씨가 결정할 영역이기 때문이다. 합의 하에 낙태를 했든, 합의 없이 아이를 낳았든, 온전히 그녀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는 문제라는 생각이다.
아이가 출산한 이상, 대중의 관심이 두 사람에 대한 비판보다는 한 인격체의 온전한 성장과, 어떤 형태로든 정우성씨와 문가비씨 두 사람이 아이와 함께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에 집중되었으면 하고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