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 중 만난 영감
오랜만에 밤 산책을 나섰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걷다가
바닥에 드리워진 검은 실루엣을 보고
고개를 들어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깊어질 무렵
가로등은 불을 밝히고
지나가는 사람을 잠시 비춘다.
지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마음이 복잡한 채로 걷는 사람
별생각 없이 밤공기를 가르는 사람
어떤 상태와 조건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을 차례로 무대 위에 세운다.
각자의 장면을 지나가는 우리를 향해
마치 연극 무대 위 핀 조명처럼
가로등은 빛을 비추며 조용히 우리의 삶을 응원해 준다.
가로등 아래에 서는 순간
우리 모두는 잠시 주인공이 된다.
자, 이제 다음 조명받으러
한 걸음 걸어 나아가자.
가로등은 우리에게 거꾸로 말한다. 어둠 속에서 빛의 진정한 힘은 어둠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있지 않다고. 가로등의 역할은 사방의 어둠 속에서도 빛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을 예감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함돈균 <사물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