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일이다.
분당선을 타고 출근하던 길이었다. 운 좋게 선릉역 전에 자리를 생겨 앉았다. 열차 정중앙,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었다.
새로 산 펜슬을 꺼내 아이패드에 모닝페이지를 적기 시작했다. 쓱싹쓱싹. 생각보다 느낌이 꽤 괜찮았다. (모닝페이지는 아티스트웨이 활동 일환이며, 적어도 세 쪽은 쓰기를 권장한다) 두 장을 겨우 채우고 나니 복정역이었다. 세 번째 페이지 첫 줄을 적기 시작했다.
어느 여성이 내 옆자리에 섰다. 검은 롱패딩에 은갈치색 미니백을 매고 있었다. 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뽀얀 피부와 검은 단발머리만 공기 중에 나와 있었다. 20대 초반처럼 보였다. 은갈치색 가방보다 그 옆에 달린 핑크 표시가 눈에 확 들어왔다. 임산부였다. 내 옆자리 여성은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가장 끝자리 중에서도 임산부를 위한 핑크카펫 자리였기 때문이다. 임산부는 수줍게 웃으며 눈인사를 건넸다.
그 사이 내 앞에 서있던 어느 아주머니가 대각선 방향으로 몸 방향을 비틀고는 핑크 카펫 자리에 앉았다. 자리를 양보한 이도, 임산부도, 나도 놀라 서로 눈을 쳐다보았다. 자리를 양보한 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말없이 서 있었다. 임산부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아주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정말 황당했다. 양보한 이가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그 아주머니의 자리 스틸도 모두 이해가 안 되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모닝페이지를 닫고 아이패드 가방에 넣었다. 임산부에게 내가 앉았던 자리를 가리키며 일어났다. 임산부는 눈인사로 감사를 전했다. 가방을 메고 좌석 앞에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핑크 배지를 단 임산부가 핑크 카펫 자리 옆에 앉아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뒤이어 방송이 나왔다.
“우리 열차에는 임산부 배려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초기 임산부도 배려해…”
아주머니는 양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고 고개는 벽에 붙인 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의 인위적인 쌍꺼풀 라인이 미워 보였다.
미울 것은 또 무엇인가. 그저 내 감정일 뿐이 아닌가. 임산부가 탔고, 어느 분이 자리를 양보했고, 또 다른 분이 그 자리를 차지해서 임산부가 자리에 앉지 못했다는 것만이 팩트인 것을! 그 아주머니가 의도적으로 행동했다는 나의 판단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괘씸하다는 생각과 감정까지 연이어진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옆에 선 분이 임산부였는지 몰랐을 수 있다. 앞에선 내게는 보였던 배지가, 옆에선 안 보였을 수 있으니까. 정말 피곤해서 앉자마자 눈을 감고 잠을 청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내가 할 일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내 마음도 그저 바라봐주는 것뿐이다. 덕분에 오늘 아침부터 수행의 시간을 쌓았고, 더 쓰기 싫었던 모닝페이지를 멈출 핑계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