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한 달 살기 남원시 운봉읍 여행길에서 생긴 일
한 달 살기 4주 차에야 읍내에 있는 성당을 찾아갔다. 마침 읍내로 나가는 버스 시간이 딱 맞아서 주중 오전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읍사무소에 내려 고요한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하나로마트가 있는 메인 도로가 아니어서였을까. 주중 10시 무렵 동네는 몹시 조용했다. 그저 바람 소리만 들렸다. 높고 푸른 하늘 위로 하얗고 기다랗게 수놓아진 구름이 나를 반겨주었다. 급격히 떨어진 기온에 새벽에 내린 눈도 보였다.
주변 건물이 모두 1층짜리로 낮은 탓에 하늘이 더욱더 높게 느껴졌다. 덕분에 성당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성모상과 잔디마당, 성당 건물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성모상 앞에 잠시 멈추어 성모송을 바치고 성당 안으로 향했다.
건물 안은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제대 위에는 초 두 대가 작고 선명하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시골 성당을 다녀본 경험이 적은 탓에 비교하기 어렵지만, 운봉 성당은 아담하고 따뜻했다. 미사 시작 전 미리 켜둔 난로 덕분이었다. 평일 미사 참여 인원수는 대략 여덟 명쯤 되어 보였다. 왼쪽과 오른쪽 두 열을 따라 의자가 십여 개씩 놓여 있었다. 왼쪽 뒤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침묵했다.
미사 시작 5분 전 어느 자매님이 내게 다가왔다. 매일미사 책을 건네고 돌아갔다. 뒤이어 다른 자매님은 내게 성가 책을 건넸다. '운봉 성당' 글자가 크게 써 붙여져 있었다. 오른 열 끝자락에 앉아 계셨던 수녀님이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건반 앞으로 향했다. '수녀님의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성가라니!' 속초에서 성가 없이 미사를 진행했던 것이 떠올랐다. 강론 시간 신부님은 인사도 없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3가지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라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셨다.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 실천할 수 있는 행동 계획을 세우는 것, 행동하는 것을 신앙생활과 연결하여 말씀하셨다.
미사를 마치고 내 자리 주위로 자매님들이 먼저 다가와 주셨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며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묵고 있는지 등을 물었다. 어느 연세가 든 할머니 자매님의 미소 깊은 주름진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디서 많이 본 표정이다. 내가 꼬꼬마 친구들을 바라볼 때 지었던 미소와 똑 닮았다.
"한 달 살기 중이에요. 서울 옥수동 성당에서 왔어요."
"반가워요. 차 한 잔 마시고 가요."
짧은 소개를 건넸다. 내게 매일미사 책을 건네주셨던 자매님이 차 한잔 마시고 가라 하셨다. 바로 옆 회합실 같은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신발을 벗어 실내로 들어갔다. 바깥보다 훨씬 냉랭한 공기가 내 몸을 감쌌다. 발바닥으로 냉기가 전속력으로 침투해왔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 깡충거리며 걸었다. 찻 잔을 받아들고 자리를 잡았다. 형제님이 건네주신 귤과 신부님이 주신 고구마 말랭이를 야금야금 입으로 가져갔다.
내게 차를 건네주었던 자매님은 탤런트 이영애 씨 같았다. 목소리 톤이 무척 흡사했다. 나긋나긋한 운율감이 따뜻한 연잎차에 녹아 내 몸을 사르르 녹여주었다. 서울이 고향이라고 했다. 그 말씀이 무척 신선했다. '서울도 고향이 될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 누군가 내게 고향을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할지 망설여지곤 했다. 고향은 뭐랄까 시골이어야 한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려 청소년기를 보냈던 중국이 그리울 때가 많아 더욱 고향 같기도 했다. 마음의 문제였다. 서울에서 왔고, 여성이고, 교인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인데. 서로를 잘 모르는 사이임에도 자매님은 다음날 본인 댁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여행자를 맞이해주는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둘레길 1코스를 같이 걷자는 제안에 귀가 쫑긋 솟았다. '이렇게 남원에 걸친 지리산 코스 전부를 걸어보는구나' 싶었다.
자매님 차를 얻어 타고 서어나무숲에 내렸다.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마을 숲'으로 선정되어 대상을 수상한 곳으로 둘레길 1코스 행정마을 근처에 있다. 나무 몇 십 그루가 모여 조그마한 숲이 있다고 들었다. 뚜벅이 여행자가 실망할까 봐 '숲만' 있다고 강조해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도 가보고 싶은 위시리스트 중 하나였다. 다만 둘레길 1코스 근처에 있는 뚜벅이로서 버스로 이동하기에 쉽지 않은 코스였다.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께 같이 가보자고 제안하려던 참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미 숲에 도착했다. 깊은 산골, 뱀사골에서 시내 람천으로 물 흐르듯 여행도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숲을 둘러보고 다시 읍사무소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삼사십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1코스의 종점이자 2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밤새 내린 비바람 여파로 다소 찬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뒤통수에 비치는 태양열로 매 순간 충전되는 듯 에너지가 솟았다. 전날 장장 16km를 걸었거늘 다리 근육과 관절 모두 말짱했다. 2코스 종점은 인월 장터 근처였다. 마침 장날이라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김장거리를 장 보러 나오신다고 했다. 부지런히 걸으면 인월에서 사장님을 만나 차를 얻어 타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다는 셈이 맞아떨어졌다. 완벽한 때였다. 2코스만 딱 걷고 돌아갈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지리산둘레길 2코스는 천국의 도로 같았다. 90% 이상 평지로 이루어져 있었고, 양옆으로 넓게 뻗은 평지 덕분에 시야가 확 뚫리는 개방감이 압도적이었다. 전날 밤 내린 비바람에 미세먼지는 등 떠밀려 내려간 지라 맑은 공기를 듬뿍듬뿍 마시며 강 가를 따라 걸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예쁘고 평화로운 길 위에 서 있다니! 게다가 혼자서 걷고 느낄 수 있다니! 행복에 겨운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모든 인연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온갖 생각이 이리 저리 튀어나왔다. 글감부터 시작해서 어릴 적 기억, 흘려 보내고 싶은 순간, 나를 옭아매는 것들, 가보지도 않은 스페인 순례길 여정까지 다양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냉혈하지 않게 바라봐줄 수 있는 여유가 충만했다. 그저 걷기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약간의 시간의 압박을 두고 옮기는 걸음도 나쁘지 않았다.
10km 가량 되는 구간이었고, 천국의 계단은 없었다. 마지막에 살짝 가파른 능선 정도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평탄했다. 갈대가 서로 비비적거리는 소리, 길바닥 돌을 밟는 소리, 냇물 흐르는 소리, 저 멀리 떨어진 도로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평야 뒤로는 동서남북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해발 450~550m의 고원지대로 구름도 산봉우리에 걸려 쉬어간다는 곳, '운봉(雲峯)'이었다. 누가 이 이름을 지었을까. 상을 줘야 한다. 찹쌀떡이라도. 너무나 찰떡같아 하는 말이다. ㅎㅎㅎ
1코스 끝부분(서어나무숲)부터 걸었기 때문에 대략 16km 가량 걸을 예정이었다. 10km가 넘어갈 즈음 오른쪽 고관절이 쑤시기 시작했다. 흥부골 자연휴양림 근처 구간은 약간의 경사가 더해졌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둘레길 3코스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2코스 이전에 3코스를 먼저 다녀왔다는 게 이렇게 장점으로 다가오다니 다행이다 싶었다. 못 먹어도 무조건 고! 이 고개만 넘어가면 인월 오일장에 가서 꽈배기를 사 먹으리라는 부푼 기대를 앉고 한발 한발 전진했다. 오후 3시쯤 둘레길 2코스 종점에 도착했다.
인월 장터 오일장은 3일, 8일에 열린다. 규모가 대단히 크진 않지만 있을 건 다 있다. 11월 두 번째 주말을 앞두고 김장준비를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기저기 소복히 싸여있는 배추와 무, 새우젓과 마늘, 청각, 양파 등이 눈에 띄었다. 끝지점까지 쭉 직진하여 군것질거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꽈배기 집이 세 곳, 어묵 두 곳, 호떡 한 곳 정도 보였다. 전부 깨끗하니 시골 장터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어느 부부가 운영하는 꽈배기 집에 멈추어 섰다. 빨간 머리 두건과 양 손에 낀 비닐장갑이 믿음직스러웠다. 오천원 한 봉지에 꽈배기와 찹쌀도너츠를 반씩 담았다.
"설탕 뿌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설탕은 공짜인데???"
공짜인데 안 뿌릴거냐고 재차 물어보셨다. 흔들리지 않고 설탕은 패스했다. 공짜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설탕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공짜 좋아하면 머리털 빠진다는 속설이 떠올랐지만) 머리 털은 여전히 빠질 수 있겠다 싶었다. 검은색 봉투에서 꽈배기를 하나 꺼내었다. 튀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따끈따끈했다. 포사삭 한 입 베어 무니 이곳이 바로 천국이었다. 봉투를 내다 버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전부 먹어버릴 각이었다. 전부 다 먹으면 곧장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판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 어느 가게 앞에 멈추어 섰다.
시장 근처에 있는 엄마 친구네 가게였다. 엄마는 인월에 가면 친구네 찾아가보라고 반복하여 말했다. 내 친구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모르는 사람인데 대뜸 찾아간다는게 어색했지만, 인월에 갔는데 안 찾아갔다는 것을 뒤늦게 아시면 이어질 말씀이 선명했다.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정말 코앞이라서, 맛있는 꽈배기를 나눠 먹을 동지를 찾으러 갔다. 반갑게 맞아 주셨지만 머쓱했다. 엄마없이 엄마 친구를 만나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전국적으로 쳐도 손에 꼽힐 게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을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 짧은 인사만 나누고 나왔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을 만나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의 20대는 어떠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볼 것을!' 뒤늦은 아쉬움이 몰려왔다. 세 네 시간 가량 둘레길을 걸었던 시간이 참 좋았는데, 차량에 탑승하니 천천히 걸을 때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조수석에 몸을 싣는 십 여분이 달콤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궁이 불 앞에 앉아 쉬었다. 아무래도 삼일 연속 둘레길 걷기는 무리일 듯 싶었다. 밀려 있는 글쓰기 시간 확보도 절실했다. 베풀어주신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했지만, 결단이 필요했다. 마침 자매님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고민 끝에 자매님께 전화를 걸었다.
"어쩌죠, 아무래도 만남이 어려울 것 같아요..."
(to be continued...)
운봉성당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천2길 14
운봉읍행정복지센터
전라북도 남원시 황산로 1083 운봉읍사무소.운봉읍보건지소
서어숲마을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운봉행정길 8-9
남원천리길지리산둘레길2코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1037-19
남원인월시장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인월로 65-3 인월지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