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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키 Dec 27. 2018

아무런 정처 없이 구르는 돌처럼

[REVIEW] 영화 <구르는 돌처럼> 


“춤출 수 있는 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영화 초반, 즉흥춤 수업에 참여한 한 참가자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는데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종종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춤출 수 있는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이 있다면 아마 나는 후자에 해당할 거라는 그런 생각.


그래서인지 지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이 영화 <구르는 돌처럼>의 시놉시스를 봤을 때도 그다지 끌리지는 않았다. 평소 다큐를 좋아하는데다 감독의 전작 <야근 대신 뜨개질>을 인상 깊게 봤던 터라 잠깐 눈길이 갔지만, ‘춤’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거리감에 결국 다른 영화를 선택했었다. 한국장편경쟁 부문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는 건 뒤늦게 알았는데, 그보다도 감상평들이 왠지 꼭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했다.


정식 개봉한 영화가 아니어서 볼 기회를 찾던 중에 얼마 전 독립영화 쇼케이스 기획전 <여성·장소·시간>의 상영작 중 하나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고작 줄거리 몇 줄만으로 한 작품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다음 상영 기회가 있다면 누군가는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써보는 글이다.

ⓒ한국독립영화협회

50여 년 동안 춤을 추며 35년간 대학에서 무용을 가르쳤던 무용가 남정호는 몇 년 전부터 방학 때마다 대안학교인 ‘하자센터’에서 청소년들과 ‘즉흥춤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해왔다. 이 다큐멘터리는 마지막 열 번째 마스터클래스가 열렸던 8일 간의 이야기를 큰 줄기로 무용가 남정호와 수업에 참여한 10대-20대 청(소)년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충실하게 담아낸다.


교장 선생님이었던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모범생 남정호는 중학생 때 무용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춤의 매력에 빠졌다. 춤출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자유로움’이 지금까지 무용을 놓지 않았던 원동력이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 아내, 선생, 때론 무용가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역할들은 내내 ‘무거운 짐’이었다.


30년 전, 그는 공연 <자화상>을 통해 옷과 가발을 벗어던지는 것으로 그 고충을 표현했고, 다시 주워입는 것으로 끝내 이 역할들을 저버릴 수 없었음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로부터 다시 30년이 지난 지금, 정년퇴임을 앞둔 노년의 이 무용가는 사회적 지위가 사라진 후의 자신을 상상하며 밥 딜런의 노래가사를 따 ‘구르는 돌처럼’이라는 공연을 만들었다.

영화 <구르는 돌처럼> 스틸컷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어떤 기분일까 
혼자서 버틴다는 게
어떤 심정일까
아무런 정처 없이 구르는 돌처럼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제목이자 공연의 제목이기도 한 <구르는 돌처럼>은 무용가 남정호의 자전적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삶의 과정에서 어느 순간, 누구나가 느끼는 보편적 감정을 담고 있다. 제도권 교육을 받고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남정호와 제도권 밖에서 대안교육을 경험한 참가자들, 얼핏 보면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것 같은 이들에게 <구르는 돌처럼>은 하나의 공통분모가 된다.


그래서 사실 이 다큐의 묘미는 완성된 공연이 아니라 세대와 경험이 다른 이들이 서로에게 배우며 합을 맞추어가는 그 과정에 있다. 남정호는 자식 세대보다도 더 어린 참여자들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참여자들의 내면을 끌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참여자들도 ‘구르는 돌’을 비단 선생님의 경험으로 한정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대입하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해낸다.


그렇게 각자가 ‘구르는 돌’이 되어 춤을 출 때, 우리는 스크린 너머 몸의 움직임들에 주목하게 된다. 거기서는 ‘춤출 수 있는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이란 없다. 외부의 시선으로 규정되고 평가당하는 대상으로서의 ‘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몸들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움에 가만히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구르는 돌처럼> 스틸컷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는 이 ‘돌멩이’들이 어떻게 될지 말해주지 않지만 이후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남정호는 여전히 자신의 존재감을 고민하면서도 “지금의 내 생각을 표현하기에는 지금의 내 몸이 최고”라며 자연스러운 변화들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자화상>과 달리 옷가지를 벗어두고 떠나는 <구르는 돌처럼>의 마지막 장면이 한결 자유로워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수업을 통해 ‘춤’을 새롭게 다시 만난 참여자들도 누군가는 ‘무용’을 전공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입시’가 아니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춤추기를 꿈꾼다. 젊은 시절의 남정호와 가장 닮아있다던 ‘고다’는 선생님과 같은 길을 가지는 않지만, 그 길이 결코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고다는 또 고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갈 테니.


아무렴 어떠한가. 우리 모두 어딘가로, 어떻게든 계속 ‘굴러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괜시리 춤이 추고 싶어지는 날이다. 아무런 정처 없이 구르는 돌처럼.



[구르는 돌처럼 / 영화]

개봉: 미개봉 / 2018년 제작

감독: 박소현

출연: 남정호, 하자센터 즉흥춤 마스터클래스 참가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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