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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키 Mar 10. 2019

여옥사 8호실이 드러낸 역사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리뷰


역사를 다룬 영화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역사 속 위인들은 언제나 대단하고 결함 없는 인물이었으나 대체로 남성이었고, 대부분 나라를 위한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따금씩 여러 주제의 시위들에 참여하지만, 애국심이나 정의감과는 거리가 먼 나로서는 그저 시대의 차이겠거니 하면서도 그들을 존경하되 공감하지는 못했었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아래 <항거>)를 보고 좀 더 분명하게 알게 됐다. 정확히는 역사와 인물을 재현하는 방식의 차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차이는 <항거>의 흥행으로 증명되고 있다. 지난 2월 27일 개봉한 후 관객 수는 손익분기점인 50만을 훌쩍 넘기고 현재 100만을 향해 가는 중이다. 3.1.절과 맞물린 개봉시기와 ‘유관순 열사’라는 강력한 소재를 감안하더라도 10억 원의 저예산 영화로서는 상당한 선전이다.       


<항거>는 비슷한 시대나 역사적 인물을 다룬 다른 영화들에 비해 여러 측면에서 관객의 예상을 영리하게 비켜간다. 우선 3.1운동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만세운동 대신 그 이후의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대문 형무소의 좁은 감옥을 배경으로 한다. 유관순 열사의 영웅주의적인 면모를 부각하기보다는 고뇌하고 성찰하는 인간 유관순에 집중한다는 점도 그렇다. 그리고 유관순 열사만이 아니라 여옥사 8호실의 다양한 여성들을 함께 조명함으로써 독립운동에서 가려졌던 ‘여성’의 존재를 회복시킨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3평 남짓한 서대문 형무소의 여옥사 8호실은 스무 명이 넘는 여성들이 겨우 발을 디디고 설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다. 곳곳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잡혀 온 이들은 지역도, 나이도, 직업도 다들 제각각이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며 고된 감옥살이를 이어간다. 고작 한 덩이의 밥을 같이 나누기도 하고, 갓 태어난 아기를 위해 각자 옷에서 솜을 빼내 아기 옷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일본인 간수들이 이간질하며 분열을 시도할 때에도 “잘못한 건 왜놈”이라며 서로에게 화살을 돌리지 않는다. 다리가 붓지 않으려 한 방향으로 원을 만들며 도는 장면은 주어진 현실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이들의 강인한 의지와 기개를 드러낸다.      


그 안에서 유관순은 한 명의 ‘완성된 영웅’이거나 영웅심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인물이 아니라 8호실 여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또 성장해나간다. 유관순은 자신이 양반집 출신에 이화학당을 다니는 엘리트라고 결코 알은 체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다방 종업원인 이옥이에게 말을 놓자며 먼저 다가가기도 하고, 기생인 김향화와도 가깝게 어울려 지내면서 누구나 동등하게 대한다. 두려운 순간에 먼저 나서고, 고문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자신을 통해 진정한 항거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3.1운동 1주년을 맞은 1920년 3월 1일, 8호실에서 다시 만세운동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8호실 여성들이 3.1운동으로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힘든 옥살이를 하면서도 다시 ‘만세’를 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면, 일본 헌병에 자원한 조선인 정춘용은 이들과 대비되는 인물로 등장한다. 갖은 고문을 당하고 끝내 목숨을 잃을지언정 굴복하지 않았던 유관순의 반대편에는 조선인 고문에 가담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비루하게 목숨을 구걸한 정춘용이 있었다.           

영화 <항거> 중, 정춘용과 유관순 ⓒ롯데엔터테인먼트

과연 무엇이 8호실의 여성들을 움직이게 했던 것일까. 나라가 있을 때에도 삶이 고달팠다던 기생 김향화의 말은 이들의 동기가 꼭 ‘애국심’은 아니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향화는 왜놈들의 성 노리개, 변기가 되어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개하며 만세를 불렀고, 이옥이는 만세를 부르다 다리가 잘린 언니를 생각하면 몇 번이고 또 외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처음에는 그저 ‘당연한 의무’라고 여겼던 유관순도 8호실 여성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동기를 다시금 생각한다. 그리고는 “자유롭게 살지 못할 바에야 사는 건 중요하지 않다”며 하나뿐인 목숨을 내가 바라는 것에 쓰는 것이 곧 자유라고 고백한다. 결국 이들이 바랐던 건 비단 ‘조국의 해방’만이 아니라 ‘모든 지배로부터의 해방’이었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유를 향한 갈망이 운동으로 이끈 강력한 힘이었다.      


이렇듯 <항거>는 국가주의에 기대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평범한 개인들의 결집된 힘에 주목한다. 이는 애국심을 강조하며 일명 ‘국뽕’을 주입시키는 영화들과 명확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남성으로 대표되는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남성을 보조하는 존재가 아닌 한 명의 독립된 주체로서 여성을 소환한다.     

영화 <항거> 중, 김향화 ⓒ롯데엔터테인먼트

“내가 남자였다면 만주도 가고 훨훨 날아다녔을텐데.”라는 이옥이의 말에 김향화는 답한다. “왜, 여자도 하면 되지.” 석방 이후 김향화의 실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항거>에서는 김향화가 만주로 떠나는 설정으로 여성독립운동가의 가능성을 확장시킨다. 심지어 다음 계획을 묻는 유관순의 오빠와 만주로 간다고 대답하는 김향화의 구도는 성별을 반전시킴으로써 신선하게 다가온다.      


<항거>는 출소 서명으로 이름 대신 “만세”를 쓴 이옥이와 만주로 떠난 김향화를 통해 유관순의 죽음에서 더 나아간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 속 한 인물의 재현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시대의 공백을 촘촘히 메우며 역사를 기록하는 새로운 방식을 완성했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누구이고, 우리는 이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100년이 지난 지금, <항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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