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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키 Dec 26. 2018

거리의 여성들을 위한 헌사

[REVIEW] <KBS스페셜> '2018 여성, 거리에서 외치다'편


KBS‘1’ 프로그램을, 더군다나 작정하고 ‘본방사수’한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원래도 즐겨보는 채널이 아니었던데다 티비 없이 ‘푹’이나 ‘티빙’ 같은 앱으로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다시보기를 하는 시청패턴상 예전처럼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볼 가능성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작년까지는 지상파 방송 자체에 대한 신뢰가 별로 없어서인지 그다지 관심이 안 갔던 것도 있다.


그러다 정권이 바뀌었고, 변화의 바람을 타고 ‘공영방송 정상화’의 의지를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KBS에서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지난 여름 KBS1에서 파일럿으로 선보인 <거리의 만찬>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세 명의 ‘여성’ MC가 진행한다는 점도 그랬지만, ‘KTX 해고 여승무원’, ‘남북 분단’과 같이 다루는 이슈에서도 전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11월 중순 시작될 정규 방송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다). 


난데없이 이런 얘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이유는 지난 10월 22일 방영된 <KBS 스페셜-2018 여성 거리에서 외치다>편이 “KBS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 또 한 번의 지점이어서다. 지금 사회가 주목해야 할 메시지가 무엇인지 읽어내고, (충분히 예상되는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송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공영방송 시사 프로그램의 역할에 충실히 부합하는, 모처럼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방송이었다. 

ⓒKBS

‘나’와 ‘너’의 분노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분노였음을 알게 됐을 때, 세상이 그런 우리의 목소리를 너무 쉽게 외면할 때, 사람들은 “거리”로 나간다. 이대로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최후의 다짐으로 덥거나 추운 길바닥 위에서 오직 내 몸뚱아리 하나로 버티고 서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이다. 촛불이 그랬던 것처럼, 그 외침들이 모여 끝내 세상을 바꾸어 가리라는 믿음으로.


2018년이 두 달 가량 남은 지금 되돌아보면 올해 나는 그런 마음으로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거리에 나갔다. 이슈는 다 달랐지만 모두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였다.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보니 부지런히 참여했던 촛불시위 때보다도 많은 횟수다. 적어도 나에게는 ‘일상’을 지켜내는 것이 불의의 정권을 끌어내리는 것보다 더 절박하고 중요했다는 의미다. 올해 불법 촬영 문제로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의 숫자만 다 합쳐도 거의 24만명에 육박할 정도니, 비단 나만의 특별한 경험은 아니었을 것이다. 
 
<KBS 스페셜>은 올해 왜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오게 됐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데서 출발한다. 일상에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세 명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투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흐름은 자연스럽게 불법 촬영, 미투, 낙태죄 폐지 등 올 한해 제기된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와 연결된다. 방송은 당사자의 시각으로 사안을 꼼꼼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관점을 넓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마주한 현실까지 함께 짚어낸다.

이가현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KBS

방송에 등장한 세 명의 여성은 페이스북 코리아가 여성의 상의 탈의 사진만 삭제한 것에 반발하며 항의 시위를 주도한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이가현 씨, STX 성희롱 사건을 폭로하며 미투 운동에 동참한 최인영 씨, 지난 지방선거에서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을 슬로건으로 내세운녹색당의 전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 씨다.


그들의 이야기는 달랐지만 같았다. 이가현 씨가 참여한 상의 탈의 시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과격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신지예 씨의 선거 벽보는 30곳이 넘는 지역에서 훼손됐다. 최인영 씨가 직장 내 성희롱을 폭로했을 때, 회사 내에서는 피해자인 인영 씨를 되려 질책하고 징계했다. 그리고 이들이 겪은 백래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고 있는 순간들과도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은, 또한 많은 여성들은 외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한테 조심하라고 할 게 아니라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고 여성들의 문제”라고 이야기하면서 “할 수 있는게 이것밖에 없어서”, “해야 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서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니까” 거리에 나섰다. 

신지예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KBS

이번 방송은 여성들이 있었던 현장과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는데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권위 있는 전문가에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를 중심으로 풀어가는 방식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여도 그간 방송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또, 개인의 이야기를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하면서 그 연결점들을 잘 꿰어냈다는 점도 칭찬할 만하다. KBS가 단순히 ‘비정상의 정상화’를 넘어 공영방송의 책무에 부합하는 가치들을 회복할 수 있는지의 기로에 선 지금, 앞으로를 기대해 봐도 좋겠다는 하나의 신호이기도 했다.


올해 나를 거리로 나가게 했던 건 8할이 ‘분노’였다. 거리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서로를 만나고 확인하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기도 하고, 무력함이 조금은 달래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민들의 힘으로 정권을 바꿔냈고 세상은 분명 바뀌고 있다는데, 여전히 우린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는 처절한 구호를 외쳐야 한다는 사실에 문득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만났으니까. 우리의 분노가 견고한 세계를 조금씩 부수어왔고, 끝내는 무너뜨릴거니까. 다가오는 겨울에도 거리로 나설 모든 이들이 부디 안녕하기를.



[KBS스페셜-2018 여성, 거리에서 외치다 / 다큐멘터리] 

방송일: 2018.10.18 

제작: 연출-최진영 / 글·구성-유수진 

방송사: KB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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