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치키 Dec 27. 2018

보아가 'WOMAN'을 말하기까지

[PEOPLE] 가수 '보아'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꽤 오래 전부터 보아의 팬이었다. 처음에는 아마도 어떤 호기심이었던 것 같다. SES의 ‘I’m your girl’ 춤을 따라 추고, god의 ‘촛불하나’ 가사를 달달 외울 정도로 가요에 푹 빠져 있었던 그 때, 보아는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존재였다. 당시 좋아했던 다른 가수들이 ‘어른’의 이미지였다면(초딩의 눈에 비친 고딩이란 그랬다), 보아는 ‘또래’에 훨씬 더 가까웠다. 


또래 친구들이 최대 관심사였던 그 시기에 ‘노래하고 춤추는 친구’로 보아를 만났던 셈이다. 지금이야 어린 나이에 데뷔하는 아이돌이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와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는 누군가가 가수를 한다는 건 꽤 낯선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보아가 매력적이라거나 노래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아마도 또래로부터 오는 강한 유대감에 이끌려 팬이 된 것이다.

보아 <Girls On Top> 앨범커버 ⓒSM엔터테인먼트

보아는 밀레니엄 시대를 여는 2000년에 <ID; Peace B>로 데뷔했다. 마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처럼 느껴지는 전화선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던 시절, “Peace B is my network ID”라며 “갈 수 없는 세계는 없”다고 말한다. 3집 <아틀란티스 소녀(2003)>에서는 “저 먼 바다 끝엔 뭐가 있을까”라며 “꿈을 잃지 않기를 저 하늘 속에 속삭”이기도 하고, 5집 <Girls on Top(2005)>에서는 “모두가 나에게 여자다운 것을 강요”하지만 “나는 나”이고, “누구도 대신 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렇듯 10대 보아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을 정체화하는 노래를 불렀고, 그건 당시 유행하던 여느 노래가사들과는 다른 지점이었다. 나는 그런 노래들에 내 모습을 투영하면서 미지의 세계를 상상해보기도 하고, 멋있고 당찬 ‘girl’이 되기를 꿈꾸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10대가 함께 지나갔다.


20대 중반의 보아는 7집 <Only One(2012)>으로 새롭게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다. 그 동안의 대표곡들이 강렬한 퍼포먼스 중심이었다면 이 노래는 부드러운 멜로디가 부각되는 음악에 남자 파트너와의 커플 댄스도 있다. 더 나아가 8집 <Kiss My Lips(2015)>에서는 ‘여성스러움’을 최대치로 부각하며 데뷔 15년만에 처음으로 무대에서 ‘치마’를 입기도 한다. 평소 보아의 걸크러시한 면을 좋아했다면 조금 낯설거나 달갑지 않게 느껴질 수 있는 변화다. 실제로 <Kiss My Lips>는 보아의 인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흥행한 곡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외형적인’ 변화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자질이다. 보아는 SM이라는 대형 엔터테인먼트에서 ‘철저하게 훈련받고 관리된’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계속해서 작사, 작곡을 해 왔다. 그러다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자작곡 <Only One>이 흥행하면서 조금씩 능력을 인정받았고, 8집에서는 12곡 전체를 작사, 작곡, 프로듀싱하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는 과거보다 최근 음악에 보아 자신의 가치와 생각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8집에도 30대 여성으로 느끼는 다양한 감성들이 담겨 있고,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하다.

보아 <내가 돌아> 뮤직비디오 중 ⓒSM엔터테인먼트

올해 초, 8집 이후 오랜만에 컴백을 앞둔 보아는 리얼리티 웹예능 <키워드#보아>에서 19년차 가수로 느끼는 솔직한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자신이 대중에게 더 이상 ‘신선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모습을 끌어내고 기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은 냉정하면서도 객관적인 자기 인식이었다. 그 치열한 고민의 결론은 “보아라는 틀에 나를 가두기보다 거기서 깨고 나와서 하고 싶은 음악을 보아답게” 하는 것이었다. 올해 2월 발매한 디지털 싱글 <내가 돌아>에서 보아는 새롭게 라틴풍의 힙합곡에 도전했고 직접 랩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10월 말에는 직접 작사한 <Woman>을 타이틀로 하는 정규 9집을 발매했다. 사실 이 얘기를 하려던 거였는데,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를 굳이 길게 이야기했던 건 <Woman>이 그 역사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서다. 대중에게 끊임없이 보여지고 평가받는 자리에서 20년 가까이를 활동해오면서 보아는 본인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여러 고충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긍정하며 여성의 ‘자존감’을 꺼내놓았고, 이를 정규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선택하기에 이른다. 뮤직비디오에도 다양한 연령과 인종의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웃지 않는’ 표정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 곡은 ‘여성’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Girls on Top>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Girls on Top>이 사회를 향한 일종의 선포였다면, <Woman>은 개개인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더 가깝다. “제 2의 누군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빛나”니 남의 시선에 속지 않기를 당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Girls on Top>을 부르던 과거를 “여자다운 것 강요했던”, “여자다움 몰랐었던” 때였노라 솔직히 고백한다. 두 곡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 지점이다. 다른 사람이 쓴 가사로 여성의 당당함을 노래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성답기를 강요받았던 10대 보아는 이제 진짜 필요한 게 “내면이 강한 멋진 나”라는 걸 안다.


페미니즘 이슈가 주목받는 사회 분위기를 의식해서 쓴 가사는 아니라고 했지만, ‘문화’란 언제나 시대와 소통하며 재해석되는 것이기에 설령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영향을 부정할 순 없다. 여성 아이돌이 책 <82년생 김지영>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비난의 이유가 되는 세상에서 <Woman>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여성 가수가 ‘섹시함’을 매력 포인트로 내세우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온 보아가 부른 노래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번 9집에서도 보아는 가사를 쓴 <Woman>외에도 자작곡 4곡을 담았다. 앞으로도 그 내용이 무엇이든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써내려가기를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보아의 노래는 이미 충분히 ‘신선할’ 것이기에.



[Woman / 음악] 

날짜: 2018.10.24

가수: 보아 / 9집 

제작: SM엔터테인먼트


치키 웹사이트: http://cheeky.co.kr/
치키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cheeky.co.kr
치키 인스타그램: http://instagram.com/cheeky.co.kr
치키 트위터: https://twitter.com/cheeky_co_kr


매거진의 이전글 거리의 여성들을 위한 헌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