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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키 Dec 27. 2018

방을 고치면 내 삶도 좀 달라질까

[NEW] 드라마 <은주의 방> 


※ [주의] 첫방 끝나고 쓰는 리뷰로 향후 전개방향에 따라 의견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음.  


20대 후반의 편집 디자이너. 늘 스트레스성 장염에 시달리고 야근한 날엔 택시를 탈까 잠깐 고민하지만 역시 만원버스에 끼이는 쪽을 택한다. 이러고 도착한 집이 드라마에 나오는 ‘홈스윗홈’이면 좋겠지만, 밤낮없이 일만 하는 일개미들에게 그런 홈은 사치다. 9평짜리 원룸에서 지난 일주일 동안 씻은 시간, 먹은 시간, 취침 시간 모두 합쳐도 총 거주기간은 18시간. 이 정도면 집이 아니라 그냥 잠만 자는 곳이라고 보는게 맞다. 철야 6일째 되던 어느 날, “못하겠다 진짜. 많이 참았다”며 제 발로 회사를 걸어 나왔다. 원래는 한 달만 쉬고 이직할 계획이었지만, 자리를 약속했던 대표가 분식회계로 잡혀가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렇게 6개월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잠깐, 넘나 내 얘기 같지만 이건 드라마 <은주의 방>의 ‘은주’ 얘기다. 차이가 있다면 내 방은 은주 방보다 더 작다는 것과, 나는 퇴사 후 은주처럼 오라는 데도 없었다는 정도? (눈물 좀 닦고…) 아, 민석이처럼 전등 갈아주는 남사친도 없구나? 아무렴 뭐, 10년차 프로자취러라 그런 것쯤은 혼자서 할 수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나는 지금 은주와 비슷한 상황이라는거다. 


주변에 부모님과 같이 사는 친구들은 언젠가 독립하면 집을 잘 꾸며보겠다는 대단한 로망을 갖고 있지만, 혼자 살아보면 안다. 그건 그냥 환상이라는 것을(물론 사람과 환경,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 동안 나에게 ‘집’, 아니 ‘방’은 1-2년에 한 번은 옮겨 다녀야 하고, 그래서 무언가 손대기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를 잘 쓰는 쪽에 가까웠다. 게다가 퇴근하면 만사 피곤해서 지쳐 잠들기 일쑤였으므로 방을 특별히 꾸밀 시간도, 의지도, 별다른 기술도 없었다.

<은주의 방> 1회 중, 은주와 민석. ⓒOlive

보아하니 은주도 크게 다른 것 같진 않다.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줘도 사는 식물을 죽이는가 하면, 옷에 핀 곰팡이들은 자기랑 사는 ‘반려곰팡이’란다. “나중에 다 필요할”거라며 온갖 잡동사니들을 끌어안고 사는가하면 바닥엔 옷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이러니 인테리어는 무슨, 제때 치우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은주의 방>은 그런 은주가 인테리어 전문가인 친구 민석을 통해 셀프 인테리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의 방 인테리어를 도와주고, 자존감도 찾아가는 이야기다. 예전에 멋모르고 돈 아낀다고 이사한 새 사무실의 인테리어를 자청했다가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안 하겠노라 다짐했는데, 과연 이 드라마가 내 흥미를 다시 불러일으킬지 두고 볼 일이다. 물세가 많이 나왔다며 닦달하는 은주네 집주인이 셀프 인테리어를 순순히 허용해 줄 것인가도 관건이다. 세입자란 이토록 서글프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은주의 방>은 올리브에서 자체 제작하는 첫 번째 드라마다. 주 1회 방영에 총 12부작으로 보통 드라마에 비해서는 짧은 편이다. <응팔(응답하라 1988)>에서 ‘성보라’ 역을 연기했던 배우 류혜영이 주인공 은주 역으로 3년 만에 복귀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배우에 따라 ‘믿고 보는’ 작품들이 있는데, 성보라 캐릭터를 좋아해서인지 류혜영의 연기만으로 어쩐지 기대가 된다. 은주 엄마 역할은 응팔에서 보라의 시어머니였던 김선영이 맡아 둘의 케미를 이어볼 수 있다. 역시 좋아하는 배우지만 극중에서 기승전‘결혼’ 타령이라 우리 엄마라면 정말 싫었을 것 같은 캐릭터다. 물론 은주는 “왜 꼭 선택지가 취직 아니면 취집이야? 엄만 엄마 딸이 할 수 있는게 일하고 결혼 밖에 없으면 좋겠어?”라며 쉬이 물러서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연간 5백 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글을 끄적일 수 있는 방 한 칸이 있다는 것에 위안하기엔 비록 매달 월세 압박에 시달리는 처지지만, 그래도 백수가 되고 보니 ‘방’이 단지 잠자기 위한 공간만은 아니었다는걸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인테리어까진 아직 잘 모르겠고, 오늘은 유일하게 키우고 있는 선인장에 물도 좀 주고 청소도 야무지게 해봐야겠다. 머무는 곳의 환경이 달라지면 내 삶도 좀 달라질까 기대하면서. 



[은주의 방 / 드라마]

날짜: 2018.11.06.(1회)

출연: 류혜영, 김재영, 윤지온, 박지현, 김선영 등

제작: 연출-장정도, 소재현 / 극본-박상문, 김현철

방송: O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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