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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May 16. 2021

집 안에서 당신만 모르는 비밀이 있다면

강화길 <음복>으로 살펴보는 가족 내의 역할과 관계



* 스포일러 주의: 이 글에는 강화길의 소설 <음복>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집 안에서 한 사람만 모르는

비밀이 있다?


주식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정보는 곧 돈이라는 것을. 특히 남들은 아직 모르는 정보를 나만 알고 있을 때 그것은 큰 가치가 된다. 이는 비단 주식 거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 관련 정보부터 각종 시험 족보에 취업 정보까지 누군가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모두 정보다. 우리는 이런 정보를 남들보다 먼저 얻기 위해 발버둥 친다. 이중 특정 소수에게만 공유되는 고급 정보를 우리는 ‘비밀’이라고 부른다.


삶의 깊숙이 파고든 ‘비밀의 경제’를 확인할 때면 아는 것이 힘이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은 참으로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내가 읽은 강화길의 소설 <음복>에서는 그 말과는 반대되는 상황이 그려진다. 주인공 세나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참석한 시댁 제사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아찔한 비밀과 마주한다. 결혼식을 치를 때까지도 전혀 알지 못했던, 그런 것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남편 집안의 비밀 말이다. 그것은 영화 <어바웃 타임>이나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에서처럼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초능력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남편 정우의 할아버지가 베트남 전쟁에 다녀온 뒤 할머니가 해준 음식을 더 이상 먹지 않았다는 참으로 인간적인 비밀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참으로 시시한 일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이토록 시시한 비밀을 시작으로 숨겨져 있던 집안의 비밀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치매에 걸린 정우의 할머니는 아들과 딸을 차별해왔으며, 차별을 정통으로 맞은 고모는 식구들 모두를 싫어한다. 그런 와중에도 고모는 자신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치매 걸린 어머니, 즉 그토록 자신을 차별했던 정우 할머니를 뿌리칠 수 없고, 대신 그런 돌봄 임무를 당연하듯 강요하는 식구들을 공격적인 태도로 대한다. 돌봄의 대가로 고모는 자신의 딸 정원을 대학에 보낸다. 한편 정우 어머니는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아들 정우의 자유를 평생토록 지켜주기 위해 아픈 시어머니를 모시며 시아버지의 제사를 열심히 챙긴다. 그 대신 정우 아버지는 아들의 삶에 일절 간섭할 수 없다.


이 중에서 가장 시시하지 않은 비밀은 남편 정우가 이 모든 일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집에서 무려 서른 두 해를 살았는데도 말이다. 덕분에 정우는 세나가 그토록 좋아하는 '평온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정우네 가족들은 이제 막 식구가 된 세나에게 이 모든 비밀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는 내 아들의 '평온한 얼굴'을 좋아하잖아, 그렇지? 우리 아들은 모르게 해 줘-.




아는 것이 힘이라면서,

왜 기쁘지 않죠?


어느 집이나 비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 공동체에서 비밀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편이 갈리고 그로 인해 누군가의 위치와 가치가 정해진다면 이를 결코 시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우네의 비밀이 세나에게 말하는 것은 명확하다. 아는 것이 약한 것이라고. 아는 자가 약한 자라고. 당신도 이 비밀을 알았으니 약자라고 말이다.


나는 책을 덮고 나서 세나가 왜 약자일까, 하고 묻는 대신 크게 안도했다. 이런 일이 우리 집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구나, 하고 말이다. 사회에 만연한 일이구나. 이것이 정우네 식구 중 누군가를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까닭이다.


고모의 딸이자 정우의 사촌인 정원의 모습도 상상해보았다. 약대 출신에 해외 생활을 하는 '잘 나가는' 그녀는 고모의 돌봄 노동 덕분에 할아버지의 제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정우와는 다르게 집안의 비밀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정원은 정우의 고모와는 다르게 가족을 떠나버리는 소극적인 대응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나는 그녀에게도 고모와 같은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결혼하기 전의 세나와 비슷할 것이다. 정원은 세나가 그랬듯 평온한 얼굴의 모습을 한 배우자를 찾을 것이고, 결국엔 세나가 될 것이다. 그녀가 비혼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세나와 정원의 모습을 번갈아 생각하며 나는 사건의 시시함의 정도를 따지기보다는 이와 관련된 근본적인 물음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녀들이 결국 정우 고모와 정우 어머니와 같은 모습이 되어 우리 사회에 반복될 것만 같은 찝찝한 느낌에서 비롯되었다. 어쩌면 세나와 정원은 우리 사회에서 정형화된 어떤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것이 정보의 법칙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가족의 일부 구성원에게만 정보가 전해지는 일이 일어날까? 무슨 논리로 생전 처음 본 며느리들에게만 집안의 비밀이 전해질까? 이런 수많은 질문들은 신기하게도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아는 것이 어째서 힘이 되지 않을까? 물론 모든 지식이 힘이 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자신이 독점하는 정보가 있는데 세나는 왜 기쁘지 않을까?’




이득이 되는

'정보의 법칙'에도

예외가 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음복>의 책장을 여러 번 엎치락뒤치락해야 했다.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정우네의 비밀은 앞서 언급한 정보의 법칙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예외 하나, 세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집안의 비밀을 획득했을 때 얻는 이득이 없다. 오히려 정우처럼 아무것도 모를 때 맑은 모습으로 경쾌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외 둘, 더욱 신기한 것은 집안의 비밀이 흔히 알려진 ‘비밀의 법칙’에서도 벗어난다는 점이다. 비밀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끈끈하게 엮는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의 사이가 가깝다는 증거이자 우정과 사랑의 증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우네는 다르다. 오히려 서로를 적대시하고 미워할 뿐이다. 그러니 기쁘지 않을 수밖에.


예외 셋, 게다가 정우네의 비밀은 희한하게도 의무의 법칙만 존재한다. 정보는 그것을 알게 된 세나에게 족쇄 같은 의무를 부과했다. 비밀을 지닌 사람은 특정 대상에게 비밀이 전해지지 않도록 반드시 함구할 것. 정우가 집안 걱정 없이 해맑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보살필 것. 이는 물론이고 비밀을 발설할 시 모진 비난을 받을 것이며 집안에서 세나의 처우가 달라질 수 있음을 명심할 것. 그리고 정보를 잘 가지고 있다가 다음 전달자에게 전달할 것. 요즘으로 따지면 세나는 사진과 문서를 온라인 서버에 저장하는 클라우드 서비스나 외장하드의 인간 버전 정도가 되겠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세나가 불쾌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역할’로만 규정한 데에서 오는 거북한 감정이었다. 정우는 아닐지 몰라도 정우의 가족에게는 ‘세나’가 아니라 정우의 며느리라는 의무를 수행할 ‘역할’이 필요했을 뿐이다. 정우를 돌보며 집안의 비밀을 유지하고 간직해서 다음 세대에게 잘 전해주는 역할 말이다. 가족들에게는 정우의 배우자가 꼭 세나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세나는 자신이 정우를 선택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녀는 그저 선택되었을 뿐이다.




역할, 그게 도대체 뭔데?


이런 찝찝한 감정이야말로 저자의 말처럼 참 시시하다. 이 지구에 역할 없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뿐 쉽게 풀리지 않는 질문이 꾸역꾸역 터져 나왔다. 역할이라는 것은 가족이라는 체제가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가족이 만들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부산물 같은 것일까? 특히 세나와 같이 비밀 유지와 정보 전달자라는 역할은 누군가가 짊어져야만 하는 역할일까 아니면 윗세대부터 내려오는 뜨거운 모성애의 부산물일까?


나는 그것이 가족 체제의 시시한 부산물이었으면 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이는 결코 부산물이 아님을 목격할 수 있다. 쉬운 예로 동남아 국적의 여성과 연결해주는 중매혼 건수는 며느리라는 역할을 공석으로 남겨둘 수 없는 가정의 숫자를 증명한다. 국제 중매혼이 비단 개인과 가족의 수요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내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는 1인당 삼백만 원에서 최대 천만 원 상당의 ‘농촌총각 국제결혼 지원금’을 지원하기도 한다. 물론 국가 차원에서는 나라의 발전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국민들의 결혼과 출생을 장려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사례들은 우리가 가족 내의 ‘희생자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규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증거이기도 하다. 2020년 기준 1개 지자체를 제외하고는 '농촌처녀' 국제결혼 지원금 제도는 없으니 말이다.


세나 같은 역할이 꼭 결혼을 해야지만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결혼 전 세나와 세나 어머니, 정우 고모와 그녀의 딸 정원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성장한 가족 내에서 역할로만 존재한다. 사실 이런 의무는 반드시 남녀 차별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는 없다. 형제나 자매로만 이루어진 집안이라면 이런 역할은 대체로 첫째가 맡는다. 남매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면 첫 번째 딸에게 전해지는 듯하다. 이러니 어디를 가나 막내는 막내답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는 주로 여성에게 이런 의무가 부여되어왔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들을 보며 가족 내의 역할 문제와 최근 증가하고 있는 20∙30세대의 ‘비혼 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생각해본다. 청년들이 ‘나답게 살기’를 주장하는 데에는 그들이 자라는 동안 가족 내에서 경험한 역할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숨 막히는 역할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 비혼을 선택하는 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또 다른 가족 내에서의 노동과 돌봄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게는 더 이상해 보인다. 만약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려면 중세의 계급 사회로 회귀해야 하지 않을까.




가족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어떤 역할로만 존재한다는 것은 실로 서글픈 일이다. 특히나 누구보다 가깝고 사랑하는 가족 사이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집안에서의 역할을 나눠 가족을 꾸려왔다. 누구는 돈을 벌어오고 누구는 가사를 맡는다.


이런 관습 속에서 결국 가족이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은 역할들의 집합체일 뿐일까?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기쁨이 되고 위안이 될 수는 없을까?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하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세나와 정원은 태초에 부여받은 역할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까?


그들을 대신하여 나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구성원들이 가족 내에서 역할을 수행하되 그것만으로 개인을 정의하지 않는 가족의 모습. 과연 어떨까? 누구도 역할을 강요받지 않고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가족. 그런 가족 체제에서는 그것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개인의 역할은 유동적으로 변동되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노동과 돌봄의 역할을 지우는 게 아니라 서로를 위해 나눠서 짊어졌으면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면 좋겠다. 평등이 아니라 협력의 원리로 가득했으면 한다. 이런 정신이야말로 집콕이 일상이 되어버린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이상이 현실이 되려면 저마다의 선택이 중요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때 그를 일개의 역할로 치환해버리지 않는 일부터 해야 한다. 지겹도록 넘쳐나는 "며느리는 이래야 해. 사위는 이래야지. 딸은, 아들은, 엄마는, 아빠는 이래야 해."라는 말. 이래야 해, 라는 말은 사람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하여 누군가를 쉽게 통제하기 위한 시큼한 변명일 뿐이다. 비겁한 변명 대신 '우리 000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런 작은 선택이 모여 따뜻한 가족 문화가 더해지기를 꿈꿔 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작품에서의 악역은 단언컨대 정우가 아니라 정우의 어머니다. 세나를 역할로 규정한 사람은 정우 어머니다. 정우 아버지는 정우와 세나 모두에게 비밀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세나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낸다. 그녀는 집안에 비밀에 대해 며느리도 모르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까발릴 것을 선택했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정우는 모르게 해 줘’라는 그녀의 말이 모성애의 부산물로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만약 당신이 정우 어머니라면 며느리에게만 전해주고 싶은 비밀이 있는가? 혹은 집안에 당신만 모르는 비밀이 있다면 당신은 그 비밀을 알고 싶은가? 아니다. 그보다도 이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주었으면 한다.


당신은 가족 안에서 역할인가

아니면 당신이라는 사람인가?






#강화길 #음복 #화이트호스 #명절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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