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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Jul 25. 2018

당신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요? 영화<어느 가족>

상실, 치유, 그리고 사랑을 담아낸 영화


어느 가족이 있었는데,



이 가족은 할머니부터 손주까지 삼 대가 모여 산다. 겉으로 보기엔 할머니, 엄마, 아빠, 이모, 아들, 딸로 이루어진 여섯 식구. 그러나 행복해 보이는 이 가족은 '가족의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가족이다. 가족을 잃은, 혹은 가족에게 잃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이토록 끈끈한 가족을 만들었을까?


이들을 두텁게 이어주는 것은 바로 가난이다. 이 가족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자처하는 오사무는, 자신이 아들처럼 대하는 쇼타와 마트에서 한 탕(?) 털어오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자칭 아버지와 그의 아들과의 호흡은 가히 환상적이다.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허름한 집에서, 할머니와 엄마, 이모는 이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훔친 물건을 되팔아 큰 이익을 남길 만큼은 없다. 그저 오사무와 쇼타가 가져오는 생필품과 식재료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이 가족이 사는 방법이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트에서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는 오사무와 쇼타 ⓒDaum 영화


유괴와 보호 사이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복도식 아파트 1층에 어린 여자아이가 잠옷을 입고 앉아있다. 아이에게 이렇게 추운 날 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 앉아있냐고 묻자 대답이 없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아이를 집에 데려간다면, 그것은 유괴일까 보호일까? 그런데, 데려온 아이가 가정 폭력에 놓인 아이라면, 데리고 있는 것이 보호일까? 아니면 유괴일까?


추운 겨울날, 어김없이 쇼타와 마트를 털어 돌아오던 오사무는, 추위에 떨고 있는 유리라는 어린 소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유리는 집 한쪽 구석에서 말없이 이 가족들을 바라본다. 가족들은 마트에서 가져온 식재료로 저녁을 해 먹으며 투덜댄다. 이 아이를 왜 데려왔냐고. (우리 여섯 식구 배 채우기도 부족하다고!) 그러나 가족들은 툴툴대면서도 유리에게 약간의 정을 베푼다. 아이의 온몸이 상처 투성이었던 것. 아이는 넘어져서 다쳤다고 한다. 아이가 안쓰러운 할머니는 아이에게 약을 발라주고, 뜨거운 면을 호호 불어 입에 넣어준다.


유리 ⓒDaum영화


저녁을 먹고, 오사무는 부인 노부요와 함께 아이를 업고 집에 데려다주는데, 그 집 밖으로 들려오는 부부의 싸우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아이를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라는 부부. "저런 이야기를 듣고 사는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속상할까." 오사무와 노부요는 그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다음날 아침, 아이는 이불에 오줌을 싸고 만다. 옷을 갈아입히는 노부요에게, "아이를 다시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닐까?"라고 묻는 오사무. 노부요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이를 강제로 데려오지 않았고,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니까 유괴는 아니야. 아이도 집에 가려고 하지 않잖아." 이렇게 보호로 시작된 일은 동거가 되었고, 유리는 이 가족의 막내딸 같은 존재로 합류한다.



유리의 상처를 담은 옷을 태우는 노부요와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 ⓒDaum영화


사랑이란 이름으로 무장한 폭력?


어느 날, 바다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유리를 위해 가족들이 발 벗고 나선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쇼핑몰에 가서 유리의 수영복을 구해오는 것. 탈의실에서 유리에게 수영복을 입혀보던 노부요와 할머니는 뜻밖의 말을 듣게 된다. "이 옷 사주면 또 때릴 거잖아." 노부요와 할머니는 말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직감한다. 아이는 옷을 사준다는 부모에게 맞았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노부요와 유리는 새로 산 수영복을 입고 목욕을 하며, 팔에 남겨진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준다. 목욕을 마친 노부요는 마당에 불을 피운다. 그리고 유리에게 이 집에 처음 입고 왔던 옷을 태워도 되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불속에 던져버린다. "사랑한다는 건 때리는 게 아니야. 그건 다 거짓말이야. 사랑한다는 건,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꼬옥, 꼬옥, (안아주는 거야.) 노부요는 유리를 힘껏 끌어안고는, 끝내 뒷말을 다 잇지 못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유리는 그 눈물을 닦아준다. 가족들은 조용히 이 장면을 지켜본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타인의 행동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타인이 아니라 부모님, 형제, 자매 등 가족의 일원이라면, 그 어떠한 행동도 사랑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부모에게 맞았음에도 노부요의 상처에 공감하는 유리를 보면, 그 아이는 폭력도 사랑으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바다에서 거대한 참치를 만난다면?
그럼, 인생에서 거대한 장애물을 만난다면?


한편, 영화는 쇼타가 '작은 물고기 스위미가 거대한 참치를 이기는 방법'을 읽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네덜란드 동화작가 레오 리오니(Leo Lionni)의 동화로, 작은 물고기가 커다란 참치를 이기는 방법은 여러 마리의 작은 물고기들이 거대한 물고기 대형을 이루어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기 다른 존재가 모여 각자가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먼저, 스위미는 이 가족의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스위미가 만드는 거대한 대형은 이 사람들이 모여 만든 '가족'을 의미한다. 스위미가 참치를 물리치는 이야기는 가족들이 모여 '가난'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각자의 능력대로 십시일반 돈을 벌어 생계에 보탠다. 다른 의미는, 가족들이 함께 '상실'을 이겨나가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잃어진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모여 상처를 이겨나간다는 의미다. 상실과 가난이라는 인생의 거대한 짐을 이겨내기 위해, 가족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이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오사무와 쇼타가 힘을 합치면 못 훔칠 물건이 없다는 것도...?) 결국, 인생의 고난을 이겨내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나란히 누운 노부요, 유리, 오사무 ⓒDaum영화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모든 것이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는 것이 정의일까? 그렇다면 이들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은 유리와, 그리고 서로와 더욱더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이쯤 되면 누가 봐도 유리를 살려낸 것은 이 가족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폭력 대신 사랑으로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따뜻한 기억로 가득 채워준다.


그러나, 이 가족들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각자 흩어지게 되고 유리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집으로 돌아간다. 언론은 이 가족의 형태와 그동안의 행태를 조명한다. 그리고, 사람이 가난과 돈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은 어디까지인가라고 질문한다. 노부요는 사람들을 향해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한다.



어느 가족 ⓒDaum 영화


결국, 돈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이 가족은 겉보기에 돈 때문이 같이 사는 것처럼 보인다. 마땅히 갈 데도 없고, 돈도 없으니까. 그러나 돈 때문에 같이 사는 것도 물론 맞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돈을 핑계대기도 한다. 이들은 돈이라는 핑계로, 진짜 가족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며 서로에게 기대지 않는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진짜 가족처럼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러면 서로에게 기대고, 기대하게 될 까 봐서. 노부요는 이런 말을 한다. "혈연이 아니라 선택으로 만난 건 더 강할지도 몰라. 유대 같은 것 말이야." 어쩌면 이들은 각자가 속했던 지난날의 가족에게 기대하고 기댔다가 상처를 받고 버려진 기억이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이 가족의 할머니, 엄마, 아빠, 이모, 아들, 딸은 각자의 방식으로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장면을 넣어 이들이 결코 돈 때문에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해변에 앉은 할머니의 시선으로 바라본 가족들의 모습 ⓒDaum영화


가족이란 무엇인가?


결국, 이 영화는 딱 두 번, 가장 중요한 단어를 무성(無聲)으로 말한다. 가족들과 바다를 찾은 할머니는 모래사장 위에 앉아 자신이 선택한(?) 가족들을 바라본다. 다섯 명 모두가 어린아이처럼 깔깔거리며 물놀이를 즐긴다. 할머니는 이들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른다. "모두들, 고~마~워!" 아무도 할머니의 말을 듣지 못했지만, 그 말이 가족의 행복을 지켜주는 메아리처럼 느껴진다.


다른 한 번은 쇼타의 입에서 나온다. 극 중 아버지 오사무는 쇼타에게 친구 같은 아버지로 다가간다. 함께 장난도 치고, 마트도 털고. 그러나 쇼타는 오사무를 끝끝내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가족이 흩어지게 된 후 다시 만난 오사무와 쇼타는 그들이 부자지간이었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느끼게 된다. 쇼타는 오사무에게 보고 싶었다는 말 대신  "오늘 여기서 자고 갈까?"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오사무는 쇼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신은 더 이상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으니 그냥 아저씨로 돌아가겠다고 나지막이 말한다. 마침내 헤어 질시 간이 다가와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는 쇼타. 그 버스를 따라 오사무가 힘껏 달린다. 달리는 오사무를 보며 쇼타는 소리 없이 툭 하고 말한다. "아버지."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가족을 이루며 고마움을 느끼는 것. 혈연이 아닌 사람에게 아버지의 정을 느끼는 것, 이 영화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 가족이며, 보듬어주는 일이 가족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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