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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Jun 06. 2019

[경건함] 베네치아의 종소리가 울리면


#01

베네치아에서는 매일 종소리를 들으며 산다. 하늘을 가득 메우는 종소리는 서서히 땅으로 내려와 간질거리는 진동으로 팔뚝에 닿는다. 종탑마다 종을 울리는 방법과 시간은 다르지만 베네치아의 중심 산마르코 광장 근처에서는 15분마다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산마르코 성당 종탑에 매달린 다섯 개의 종들이 오묘한 화음을 만들어내며 광장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종소리는 근엄했다. 마치 이 세상 모든 진실은 자신이 다 가지고 있다는 듯 경건하게 울려 퍼졌다. 그렇다고 온갖 기술로 화려하게 뽐내지도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묵묵히 자신의 몸을 움직일 뿐이다.


산마르코 성당 종탑이 들려주는 종소리


처음에는 이 종소리가 하나의 소음이었다. 베네치아 정착 초창기, 회사 동료의 집에서 지냈을 때 매일 아침마다 벌떡 잠에서 깨어나 앉아 깜짝 놀란 토끼눈으로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그 집은 말 그대로 종탑에 둘러싸인 집이었다. 꼭두새벽부터 사방의 종탑에서 얼마나 요란하게 종이 울리는지, 뭐라도 부서지는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 그것도 15분 간격으로 말이다.  



#02

시간이 흘러 점점 베네치아의 종소리에 익숙해지니 이 종소리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길을 걷다 보면 시계를 보지 않아도 대충 몇 시쯤 되겠지 하는 것들을 가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6시 30분 언저리에 나온 것 같은데, 길에서 친구를 만나 신나게 이야기를 하던 중 종이 울린다면, '아, 한 6시 45분쯤 되었구나! 얼른 집에 가야겠네.' 하는 것이다. 들고 다닐 수 있는 개인 시계가 보편화되기 전 종탑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03

매일 종소리를 들으며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뭐랄까, 매 순간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느낌이랄까? 종소리를 들으며 집을 나서고, 배를 타고 출근하면서도 종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맞추고, 일하면서도 종소리를 듣고. 관광객들 사이를 걸어 다시 집으로 갈 때면 늦은 오후의 거무스름한 햇빛을 받아들이며 또다시 종소리를 듣는다. 종소리는 이 모든 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주요 장면에 배경음악을 넣어 중요한 장면을 더욱 부각하는 것처럼, 나의 평범한 일상도 종소리가 깔리며 특별한 장면이 되는 느낌이다. 그럴 때면 꼭 하늘을 올려다보며 종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본다. 정말 신기한 건 종소리를 듣다 보면 시간이 무한정으로 느려져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04

그런 순간들 중에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그스름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듣는 종소리는 뭔가 엄숙하다. 해가 지기 전 적당히 더운 햇빛에 섞여 드는 선선한 저녁 바람, 알록달록한 집들로 둘러싸인 운하 사이로 곤돌라가 지나가는 광경을 보며 종소리가 들려오면 서서히 상상 속으로 빠져든다. 마치 운명의 상대가 저 골목 끝에서 걸어올 것 같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우연히 만나는 몽글몽글한 장면. 그러다 별안간 그 종소리는 느릿느릿 걷고 있는 나를 강하게 깨운다. '이봐요, 그런 상상을 할 때가 아니야. 오늘 하루 알차게 보냈어?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어.' 종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경건한 목소리로 진실을 말해버린다. 그렇게 종소리를 듣다 보면 갑자기 무서워진다.



#05

문득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내가 정말로 원하는 일인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시간을 허투루 쓴 것은 나인데, 저렇게 내 마음을 울리고 가버린 종소리가 괜히 얄밉다. 그리고는 저 얄미운 종소리를 멈춘다 해도 시간이 가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을 차갑게 느낀다. 내가 나를 잘 몰라서 이 시간을 흘러 보낸다는 게 속상하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게다가 유한하고, 도대체 뭐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울컥하는 마음에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냅다 달린다. 그러다 베네치아의 좁은 골목길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힐 뻔하고는 얼마 뛰지도 못하고 뜀박질을 멈춘다. 그래, 이렇게 가쁘게 숨을 쉬는 것을 보니 살아는 있구나. 나는 그래도 살아 있는 내가 소중하구나.


이렇게 뛰어도 답답함은 여전하다. 영원히 늘어진 저 시간 속에 살 수는 없을까? 행복한 상상을 하며 시간을 마음대로 늘리고 줄일 수도 있는 그 시간.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본다.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게 얼마나 되는지를 모르니까. 치사하게 내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려주지도 않고 자신의 존재만을 알리는 저 종소리에 엄숙해지고 경건해진다. 매 순간이 가진 무게를 다시 한번 느끼며 집에 도착한다.



#06

보이지 않는 시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힘. 종소리는 시각을 알려주고 시간을 일깨워준다. 매일 종소리를 들으며 산다는 건, 최소 하루에 한 번 내 인생에 대해 고찰하며 사는 것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더욱 치열하게 살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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