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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Jun 07. 2019

[뿌듯함] 서울 사람의 부산 여행  


이 발견은 다음의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아주머니가 샐러드 채소만 주고 소스를 안 주셨네."



#01. 광안리 

여름이 다가온다는 예고편을 사방으로 보여주는 날씨에 부산을 여행했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걷다 마침내 광안리 해수욕장을 마주했다. 탁 트인 바다를 보니 속이 뻥 뚫렸다. 매일 바다를 보면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함께 온 십년지기 친구에게 물었다. "부산에 사는 내 친구는 그냥 그렇대. 그냥 배경 중 하나래."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이렇게 운치 있는 광경을 매일 보는데!" 밤이 되자 부산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여기는 우주 같아. 바다가 밤에는 검게 보이니까 건물들이 밤하늘에 둥둥 떠있는 모습이야. 예쁘다." 밤바다를 보니 내 안에 없던 시(詩)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02. 해운대 횟집

광안리에서 해운대까지 실컷 바다를 구경하고, 서울에서부터 노래를 불렀던 회를 먹기로 했다. "1인분만 사자." "무슨 소리야, 부산 왔는데. 2인분 사자." "야, 우리 오늘 1시부터 밀면 먹고, 떡꼬치도 먹고, 곰장어 먹고, 어묵 먹고, 너 배 안 불러?" "배부른데, 이왕 먹는 거 많이 먹으면 어때? "음. 나는 많이 못 먹을 것 같아. 1인분만 사자. 너 많이 먹어." "오케이" 고민 끝에 둘이서 1인분을 포장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03. 숙소

"아주머니가 샐러드 채소만 주고 소스를 안 주셨네." "으잉? 그럴 리가, 잘 찾아봐." "대박! 회가 1인분인데 초장이 이만큼이야!" "그냥 그 크기로 여러 개 포장해두고 하나 주신 게 아닐까? 모자라는 것보다 좋지 뭐." 옷을 갈아입으며 친구의 언박싱(unboxing) 생중계를 들었다. 식탁에는 돈가스를 먹을 때 함께 나오는 채 썬 양배추 한 접시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연두부 한 모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플라스틱 육면체 상자에 초장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1인분 샀는데 많이 챙겨주셨네." 그것 말고도 상추 한 움큼, 초밥용으로 빚어진 밥 10알, 묵은지 한 통, 간장, 고추냉이, 쌈장에 콩가루까지, 정말 진수성찬이었다. "진짜 없네 샐러드드레싱. 그냥 먹자." 싱싱한 회는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이런 게 힐링이지." 아주머니가 챙겨주신 재료들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알차게 먹다가 이 콩가루는 왜 주셨을까 궁금해졌다. "이거 껍데기 먹을 때 먹었었는데." 바싹하게 구운 돼지 껍질을 먹던 것처럼 회에 초장을 찍어 콩가루에 살짝 굴렸다가 먹었다. "음, 맛있네. 근데 이게 뭐가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핸드폰을 꺼내 머리를 굴렸다.



#04. 검색어 

무슨 단어를 검색해야 방법이 나올까. [부산, 회]라고 하면? 아니야. 그럼 횟집 이름만 잔뜩 나올 텐데. 그럼 [회, 콩가루]는? 이렇게 검색하니까 어디선가 송어회를 콩가루와 먹는다고 나온다. 우리가 산 회는 송어회가 아닌데. 다른 검색어가 필요해. 뭐가 있을까. [회, 콩가루, 부산] 여러 글들이 나온다. 어떤 글을 보니 "콩가루 없는 회는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이거구나. 글을 후루룩 훑어 읽었다. 친구를 다급하게 불렀다.


"초장을 많이 준 이유 찾았어. 초장을 저 양배추에 부어. 그게 소스야."

"무슨 소리야, 여기에 초장을 왜 부어."

"부산에서 이렇게 먹는대! 이게 '회비빔'이라는데? 어쩐지, 초장에 깨도 들어가 있고 마늘도 넣은 것 같고 뭔가 맛이 달다 했어."

"진짜? 확실해? 진짜 붓는다?"

"응! 그리고, 콩가루를 넣어."

"콩가루를? 얼마나?"

"전부. 그 통에 있는 거 다 넣어. 여기에 회를 넣고 버무려 같이 먹는 거래."

"이거 믿어도 되는 거야? 너 먼저 먹어봐."

"유레카. 이거다. 진짜 맛있어! 콩가루가 신의 한 수야.  고소하고 식감 장난 아니야."

"오~ 대박이네!"

"우리 진짜 웃기다. 초장을 왜 이렇게 많이 줬냐고, 샐러드에 소스가 없다고 그랬는데. 큭큭. 그래서 나 여기에다가 고추냉이 엄청 넣었는데! 얼른 먹어봐."

"하하, 이거 진짜 맛있다. 검색 안 해봤으면 모를뻔했어."


이것은 물회 아니고 회냉면 아니고 비빔 회냉면 아니고, 회비빔밥도 아니다. 고소하고 달고 아삭아삭한 새로운 맛이다. 초장을 많이 준 걸 궁금해하고 양배추를 그냥 줬을 리 없다고 생각한 내 자신이 대견했다. 귀찮다고 넘어가지 않고 찾아본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뭔가 부산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것도 몰랐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05. 매력

"맛있다. 더 살 걸."

"거봐, 내가 2인분 사자고 했지?"

"그럴걸 그랬어. 한 점 한 점이 사라지는 게 아쉽다."

"오늘 야식은 콩가루가 다 했다."


마지막 한 점은 서로에게 양보하느라 아웅다웅하다가 입속으로 사라졌다. 그 많던 양배추와 초장, 콩가루는 흔적조차 없어졌다.


매력에 빠진다는 것은 이런 것 같다. 어떤 대상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신선한 모습에 반하는 것. 차가워 보이는 사람이 환하게 웃을 때, 묵뚝뚝 해 보이는 사람이 한없이 다정할 때. 부드러워 보이는 사람이 강인한 모습을 보여줄 때. 그리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고소한 콩가루가 새콤한 초장과 어울릴 때.



#06. 결말: 이건 운명이야!

나는 이 발견을 중대한 업적으로 기억하고 싶다. 여행 중 일어난 소소한 일로 남겨두고 싶지 않다.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라고나 할까? 그 아주머니 아니었으면 이것도 모르고 다시 서울에 갈 뻔했잖아. 이건 운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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