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 정착기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
대학을 졸업하고 잡은 나의 첫 직장은 아모레 퍼시픽(구 태평양 화학)이었다. 그때까지 화장품 중심이던 아모레 퍼시픽이 샴푸, 비누, 치약 등의 가정용품으로 제품 다변화를 꾀하면서 대전에 제품 제조 공장을 세웠는데 나는 화장비누 파트의 엔지니어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새내기 엔지니어로서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통해 정말 많은 성취감과 함께 경험을 쌓아가던 때였다. 또 일본의 대표적인 화장품 회사인 시세이도로 파견되어 연수를 받으면서 생애 첫 해외여행을 해보는 기회도 가졌다.
아모레 퍼시픽에서 8년 정도 근무하고 과장으로 승진해야 할 즈음에 나는 당시 주위 사람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회사인 듀폰 코리아의 생산 담당 부서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 일은 한국 회사에서만 근무했던 내가 나일론, 타이벡 등 초 일류 화학 제품을 생산하던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듀폰을 만나면서 실로 엄청난 문화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한 예를 들어 본다면 회사를 옮기기 전, 일본의 관계 기업들을 돌아보는 한 주짜리 연수 출장 품의서를 기안했던 일이 있었다. 그 한 번의 출장을 위한 품의서에는 무려 십여 부서의 결재가 필요했었다. 우리 부서와 공장 내 관계 부서 그리고 본사 재정 부서 등 층층이 스무 명 가까운 부서장들의 동의를 받아야만 했었다. 걸리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결재를 득하는 중에 심지어 서류를 다시 작성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실로 출장을 거의 포기할 뻔했던 힘든 경험이었다.
듀폰에 매니저로 입사하여 내가 처음 맡은 업무는 울산에 세워진 신규 케미컬 플랜트의 직원들을 채용,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훈련 과정 중에는 직원들을 이미 가동 중인 일본의 듀폰사로 한 달 동안 기술 연수를 보내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려 20명이 넘는 많은 인원이어서 정말 크나큰 재정이 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 내가 작성한 연수 품의서에는 과연 몇 명이나 서명을 해야 했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해당 부서의 책임자였던 나 한 사람의 전결로 끝이었다.
나중에 플랜트의 책임 매니저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물을 기회가 있었다. 그 대답은 바로 내가 전년도 제출한 업무 계획서가 이미 회사의 승인이 난 일이기 때문에 굳이 다시 반복할 일이 없다는 간단한 대답뿐이었다. 진짜 놀라웠던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책임과 권한이 분명한 조직이었다,
이때 7년간 듀폰에서 근무하는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로 인한 영향이었는지 더 늦기 전에 다른 나라에 나가 살아봐야겠다는 강한 동기가 생겼다. 그래서 전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를 위해 학교를 찾던 중, 뉴질랜드의 한 학교를 발견하여 그곳에 지원하게 되었다. 유학을 준비하는 동안에 뉴질랜드가 점수제로 영주권을 주는 제도가 있음도 우연히 알게 되었고 해당 요건이 갖춰진 나는 영주권까지 얻게 되었다. 그리고 유학생이 아닌 영주권자의 신분으로 건너가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렇게 하여 뉴질랜드에서 공부를 하던 3년 반 동안, 우리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의 이민 수속을 시작했다. 내게는 일해 볼 수 있는 좀 더 넓은 환경이 필요했다. 그를 위해서는 역시 예전 미국 연수 시절 경험했던 미국의 환경이 더 의미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 결정으로 인하여 필요한 모든 수속을 마치고 드디어 2002년 2월, 미 대사관에서 성공적인 인터뷰와 함께 미국 영주권을 손에 넣어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미국에서 보험 에이전트라는 커리어
나와 같은 초짜 이민자에게 미국의 일자리는 만만치 않았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일자리 찾기 사이트인 monster.com에 이력서를 올렸지만 어디로부터도 응답을 받지 못했다.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던 나는 얄팍한 통장 잔고가 더 얇아지는 걸 기다릴 수가 없었다. 마침 출석하던 교회분의 도움으로 그나마 사무실 청소라도 시작하게 되었다. 아마 청소라는 일은 거의 모든 미국 이민자들에게 거쳐야 할 필수 교양과목과도 같지 않았을까 싶다.
정말 자신 있게 미국 땅에 들어간 것 같은데 지금도 그 당시를 뒤돌아 보면 마치 절망감의 터널 가운데 있었던 것 같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던 때였다. 내게 허락된 유일한 긍정은 아침마다 홀로 하나님 앞에 나가던 큐티 시간뿐이었다.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던 엘리야를 묵상하면서 홀로 기도를 하곤 했다.
‘하나님, 저를 도울 사람 좀 제게 보내주십시오!‘
어느 주 금요일 저녁, 교회의 순모임에 나갔던 나는 순 목자님으로부터 한마디를 들었다.
‘집사님, 차라리 보험을 해 보시지요.’
난 평생 영업을 해 본 적이 없다. 한 번도 영업이라는 일은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보험 영업이라니… 하지만 내게 그날, 그 권유는 무슨 응답 같았다. 적성이고 뭐고 따져 볼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 날 토요일 아침, 동네 슈퍼에서 주말판 워싱턴 포스트를 한 부 사서 뒷 면의 구인 광고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파이낸스 트레이닝을 제공한다는 두 줄짜리 광고를 하나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용기를 내 전화를 걸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연으로 인해 나는 업무에 필요한 라이선스 세 가지를 두 달 내에 모두 취득하고, 48세의 늦깎이로 미국 땅에서 보험 에이전트가 되었다. 그리고 정말 힘들었지만 다소 얼마간의 경험이 쌓이면서 한국 교민들에게 보다 접근이 용이한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거기서 비로소 진짜 보험 영업을 시작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무렵 우리 4인 가족은 한 팀으로 사무실 청소를 맡아하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경에 투입되어 밤 열한 시 정도까지 일을 하곤 했는데 한 달에 $1,500 정도 받았던 것 같다. 한 달 생활비가 $2,000 정도 필요했던 우리에겐 다소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아내가 따로 벌어 오던 급료가 있어 급한 대로 밸런스를 맞출 수 있었다. 더 이상 돈을 까먹는 일은 막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보험 영업을 시작하고 나서 번 첫 달 수입은 무려 $3,000 정도나 되었다. 이는 정말 짜릿한 경험이었다.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온 가족을 고생시키지 않고 나 혼자서 이렇게 한 달 생활비나 될만한 큰돈을 벌 수 있다니… 보험 라이선스가 가진 진짜 큰 힘을 보게 된 귀중한 경험이었다.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민 초짜로 주위에 아는 사람이 변변치 않았던 내게 진짜 도전은 사실 그다음이었다. 원체 사교성이 적은 내가 누구를 찾아가 보험 권유를 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진짜 에이전트가 되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그를 위해 내가 정한 몇 가지 규칙 중 첫 번째는 아침에 제일 먼저 사무실에 출근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빈 사무실 이른 시간에 홀로 출근해서 큐티를 하고 노트엔 나의 목표와 꿈들을 적어 나갔다. 아직 내게 업무 훈련도 시켜줄 만한 사람도 따로 있지 않은 회사여서 시간이 나면 혼자 도서관에 가 관계 서적들을 뒤지곤 했다. 그렇지만 전부 영어로 된 책들 뿐이어서 많이 헤맬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렇게 출근했다가 영업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오면 갈 데가 정말 없었다. 갈 곳 없어 어느 백인 동네에 차를 주차하고 차 안에서 책을 읽다가 신고받고 나온 경찰에게 검문을 받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나의 첫 3개월의 실적은 내가 생각했던 6개월치 생활비를 이미 벌어 놓고 있었다. 이 사실은 진짜 까마귀로부터 먹이를 공급받던 엘리야와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매니저로의 승진
6개월 정도 그렇게 헤매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무렵의 어느 날, 스테이트 매니저에게서 면담하자는 콜을 받게 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와 앉은 나는 한 오퍼를 받게 되었다. 당시 사무실에는 지역 담당 매니저가 한 명 급히 필요했었는데 내 이력서를 보니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에서 이미 매니저 경험이 있었고 또 필요한 라이선스도 이미 다 취득한 상태에다 지난 몇 개월의 실적도 별로 나쁘지 않아 보인 것 같았다. 또 아침마다 성실하게 출근하는 게 인상 깊었다는 말도 들은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첫 질문으로 매니저가 되면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게 연봉과 베네핏이 제공된다는 대답을 해줬다. 또 내가 하는 일도 제품 영업이 아니라 에이전트 리쿠르팅과 팀 관리가 주된 업무라는 대답이었다. 이 말에 나는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그동안 일을 얻기 위해 뛰어다니던 나에게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위치에서 일하라는 것이다. 또 실적이 있어야만 지급되는 커미션이 아니라 그보다 많은 금액을 고정급으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회사마다 매니저가 되기 위해선 일정 근무 기간을 채우거나 필요한 사전 성과도 내야 하고 또 그밖에 소정의 훈련 절차를 거쳐야 하는 제도가 있다. 나는 어느 것에도 자격이 안되었다. 그렇지만 스테이트 매니저는 내게 필요한 모든 교육이나 절차를 예외로 진행시켜 주었다. 2년짜리 고급 매니저 과정을 6개월 만에 업무에 병행하면서 취득해도 되도록 본사의 승인을 받아주었다. 승진은 먼저 하되 6개월간은 수습 매니저처럼 교육을 병행해도 좋도록 양해도 구해 주었다.
이 일은 내게 보험업에 대해 상당히 만족스러운 느낌으로 일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후에 다른 몇몇 메이저 보험사로 자리를 옮겨 일하게 되지만 이때 얻은 매니저의 커리어는 이민자로서의 내게 프로페셔널로 자리를 잡아가는 큰 틀이 되어 주었다.
지금은 뉴욕라이프와 매스 뮤추얼의 매니저를 거쳐 미 동부 워싱턴 지역에서, 175년의 역사를 거진 내셔널 라이프 그룹의 디스트릭트 에이전트로 업무를 하고 있다.
매니저로서 성취감을 가장 맛볼 수 있는 부분은 바로 나의 팀이 내는 연간 실적을 통해서이다. 이런 종류의 성취는 많은 수입의 기회가 되기도 하겠지만 또 늘 나 스스로의 목표 성취에 대한 동기부여의 주제였다. 내게 천만 불이라는 팀의 목표를 달성해 보고 싶다는 꿈이 생긴 것이다.
지금의 회사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버지니아, 메릴랜드의 한인 에이전트를 중심으로 팀 관리를 하다가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와 LA에 매니저를 뽑고 사무실을 열게 되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지역권을 중요시하는 보험업계에서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 회사의 한국인 최초의 매니저로서 서부까지 영역을 확장해 보고 싶다는 내 마음과 마침 좋은 인재를 만나게 되어 본사의 예외적인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몇 년간 매달 동서부를 오가며 일을 하게 되었지만 장시간 비행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디스트릭트 매니저로서 탑의 위치를 맛보기도 했던 귀한 경험이었다.
내 커리어의 꽃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내가 그전에 6년간 쌓았던 모든 조직을 잃게 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내가 뽑아 승진시켰던 매니저들이 내게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리고 만 것이다. 그들에게 물론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일로 인한 배신감에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자 마음을 추스르기 위한 방법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명상과 마음 챙김을 알게 되었고 또 그 방법도 배우게 되었다. 그 일로 미국 보험업계의 어느 한 면과 함께 사람의 진면목에 대해서 알게 되는 귀한 경험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마음 챙김을 공부하면서는 갈급한 마음에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때 접했던 책들은 잭 캔필드의 ‘석세스 프린시플,’ 넬슨의 ‘소망을 이루어 주는 감사의 힘,’ 이시다 히사쓰구의 ‘3개의 소원 100일의 기적,’ 박용철의 ‘감정은 습관이다,’ 유근용의 ‘메모의 힘,’ 브렌든 버처드의 ‘백만장자 메신저,’ 김상운의 ‘왓칭’ 시리즈, 안젤름 그린의 ‘당신은 이미 충분합니다,’ 켈리 맥고니걸의 ‘스탠퍼드 성장 수업,’ 권오현의 ‘초격차,’ 사이토 히토리의 ‘그릇,’ 론다 번의 ‘시크릿’ 시리즈, 엘렌 랭어의 ‘마음 챙김,’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잡아라,’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할 엘로드의 ‘미라클 모닝,’ 한상복의 ‘보이지 않는 차이,’ 네빌 고다드의 ‘리액트’ 등 전 시리즈., 헨리에트 클라우저의 ‘종이 위의 기적, 쓰면 이루어진다,’ 등등 수십 권의 많은 책을 접하며 전체적인 마음을 가다듬고 의식을 깨우는 시도를 평생 처음 시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독서를 하면서 십 여권이나 되는 많은 메모노트도 아울러 쓰게 되었다. 이때 그로 인한 나만의 내면 여행이 얼마나 풍성해졌는지 모른다. 비로소 나의 인생에 대한 목표들을 다시 세우고 앞으로의 흥미로운 여행들도 다시 꿈꾸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네 권이나 되는 많은 책을 한국에서 출간하게 되는 귀한 인생의 성취도 얻을 수 있었다.
보통 미국의 보험회사들은 매년 한 해 동안 성공적인 에이전트들을 초대해 축하해 주는 성대한 컨벤션을 하곤 한다. 난 매년 이런 행사들을 참가할 때마다 유심히 챔피언 에이전트들을 살펴보곤 했다. 한국인 에이전트들이 미국의 많은 회사에서 두각을 나타내곤 하지만 내게는 아직 그런 챔피언들을 배출할 기회가 없었다.
위의 사건 이후 나는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배신감보다는 감사함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비로소 내게 찾아온 평안 속에서 진짜 업계의 챔피언들을 만나게 되었다. 기적이 아니면 설명이 안될만한 에이전트들과 파트너를 맺게 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안될 그림들을 보게 된 것이다.
천만 불이란 숫자는 보통 내 목표의 다섯 배가 되는 숫자이다. 보통 어지간한 작은 에이전시들도 감당 못할 숫자이다. 그러나 목표를 세우고 나자 큰 프로듀서들이 하나, 둘씩 내 주위로 모여들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내가 생각했던 이들이 아침마다 비전보드에서 내게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챔피언들이 단상에 불려 올려져 회사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고 일일이 축하의 허그를 나누는 모습을 생생히 그리고 있다. 회사의 CEO가 친히 나의 테이블로 다가와 악수와 함께 스테이지로 안내할 때 전달되는 힘을 느껴 본다. 그렇게 천만 불의 금자탑을 이루는 그 순간을 생생하게 바라보곤 한다. 아마도 그것의 증거는 재활의 시간을 지나면서 계속 성장하고 있는 실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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