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프랜시스
홍콩은 내가 다른 범주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로 품고 있는 도시였다. 멀리 홍콩섬의 건물들은 모두 빛 속에서 춤을 추며 현대적인 멋을 자랑하지만, 가까이 보면 오래된 멘션들과 철근 대신 대나무를 외벽에 세운 기이한 건설현장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자주 볼 수 없던 고급 스포츠카들이 건물의 쇼윈도 안에 전시되어있고, 그 사이를 낡은 이층 버스와 트램이 어지럽게 지나다녔다. 홍콩 사람들은 손에 국수나 볶음밥 따위를 싸들고 어딘가로 향했고, 길에 흔히 보이는 서양인들은 더운 날에도 새까만 정장을 차려입고 차가운 건물로 들어가고 나왔다.
9년 전, 처음 홍콩을 방문했을 때였다. 언니는 홍콩의 밤거리는 응당 란콰이펑에서 즐겨야 한다고 했다. 언니에겐 두 번째 방문이었기 때문에 아주 믿을 만한 정보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것을 우리 계획표에 단단히 적어두었다. 몸을 울리는 음악소리와 시원한 맥주가 외국에 놀러 나온 우리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켜줄 것이다. 흥이 오르면 춤을 추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소리를 질러대야지. 우리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어쩌면 란콰이펑 방문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었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젊음의 거리, 란콰이펑에 우리는 잘 녹아들지 못했다. 유럽 혹은 미국에서 온 사람들로 테라스가 꽉 찬 어느 술집에 들어가 봤지만 우리를 위한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음악이 시끄럽게 터져 나오는 클럽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 대신 맥주를 값비싼 가격에 팔았다. 어쩔 수 없이 값비싼 맥주를 사들고 클럽에 들어갔지만, 놀라울 정도로 내부가 휑해서 급하게 맥주를 들이켜고 나왔다. 클럽 선정에 실패한 것이다. 이대로 숙소에 돌아갈까 하다가 역시 사진을 남겨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텐션을 끌어올려 밝은 얼굴로 길에서 몇 장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코너를 돌자 세븐일레븐이 나왔다. 그때 우리는 그곳이 진정한 핫플레이스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비싼 맥주를 파는 클럽에 보이콧하는 사람들이 다 그곳에 몰려있었던 것이다. 길에서 흥겹게 맥주를 들이켜는 사람들 너머로 세븐일레븐 내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편의점 안에 길게 줄지어선 사람들은 모두 손에 맥주를 들고 계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구나. 오늘 우리가 취할 곳. 세븐일레븐 앞 길거리. 맥주를 값싸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보다도,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줄지어선 사람들 속에 우리도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신나게 했다.
그 길에 서서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아무 사람들과 쉽게 말을 섞었다. 주로 현지인들이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열 번쯤 했고, 뚜껑도 따지 않는 차가운 맥주를 두 번이나 선물 받았다. 홍콩 대학 동문회를 마치고 란콰이펑에 놀러 온 다섯 명의 무리들과 가장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까지 어디를 여행했는지, 서울은 어떤 곳인지, 그리고 처음 보는 남녀들이 물을법한 질문들을 하며 맥주를 마셔댔다. 그러던 중 비틀거리는 백인 두 명이 서로 주먹질하고 싸우며 맥주병을 깼다. 그 난리통에 우리는 홍콩 대학 동문들을 따라 소호로 이동했다. 그 동문들 사이에 프랜시스가 있었다.
홍콩을 떠나는 전날 밤에도 우리는 프랜시스와 또 다른 세븐일레븐 맥주 멤버였던 다롄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그때 우리는 어떤 대화를 했을까. 9년이라는 시간이 그 내용을 모조리 다 지워버렸다. 하지만 프랜시스가 집으로 가던 택시를 돌려서 우리 호텔 앞으로 다시 찾아왔던 기억이 난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나에게 '가지 마'라고 했던가? 나도 그때는 여행의 흥분에 취하고 술에 취해서 그것이 꽤나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외국인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올해 초 프랜시스에게서 뜬금없는 메시지가 왔다. 프랜시스는 이렇게 때때로 시답지 않은 메시지를 보내오곤 한다. 나와 내 개의 안부를 묻고, 떡볶이를 먹고 싶다고 하거나, 역시 한국 여자가 예쁘다고 아저씨 같은 말을 하고, 내가 알려준 한국말을 영어 스팰링으로 써서 (Daebak!) 메시지를 보내온다. 프랜시스를 알게 된 해부터 코로나 직전까지 우리는 여러 번 재회를 했다. 프랜시스가 두 번 서울에 왔고, 내가 홍콩에 두 번 더 방문을 했다. 이제 '가지 마'같은 끈적한 말은 절대 서로 하지 않지만, 왠지 '외국인 절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구가 아닐까? 오늘은 나도 시답지 않은 메시지를 하나 보내고 싶다. "란콰이퐁은 여전히 세븐일레븐 앞이 제일 핫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