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울렁증, 나만 그래?
"어떻게 지내세요?"
처음 방문한 카페, 살면서 처음 본 직원이 커피를 시키려는 나의 안부를 묻는다. 내 뒤로는 여러명의 손님들이 주문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지내냐는 살가운 질문에 나는 살짝 당황한다. 초등학교 때 배운 데로 난 잘 지낸다고, 고맙다고, 너는 어떠냐고 질문을 돌려주는 동안, 순간적으로 시키려던 커피의 이름을 까먹어버렸다. 민트 모히토 커피, 메뉴판을 여러 번 올려다보며 두세 번 입으로 되뇌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한국이었다면, 정말로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문장이었다면, 꽤나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그곳이 샌프란시스코였고 'How are you?'라는 영어문장이었다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면 미국에서는 그게 자연스러워 보이고 한국에서는 그게 부자연스러워 보이니까.
다시 입술을 달싹거려 민트 모히토 커피를 간신히 발음하고, 동전을 셀 필요 없이 커피값보다 큰 단위의 지폐로 계산을 마쳤다. 환전은 괜히 했나, 카드만 쓸걸. 미국 잔돈들은 센트며, 쿼터며, 세는 법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계산대 앞에만 서면 마음이 촉박해서 동전을 세고 있을 여력이 없다. 용건은 간단히, 용무는 신속하게, 커피를 시킬 때조차 조급증을 내는 것을 보니 나는 영락없는 한국인인가 보다. 독특한 '민트 모히토 커피'만큼이나 카페 직원의 느긋한 안부인사가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나 영어 못하니까 제발 말 좀 시키지 말았으면'하고 생각하다가도, 어쩌면 친근한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진정한 매너인가 싶기도 하다. 주문하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서있는 나를 해치워야 할 한 명의 일거리로 받아들이기보다는(기계적 Next please~) 안부를 물어가며 사람대접을 해주는 것이니까 말이다. (미국엔 진동벨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주는 카페들만 있는 것도 아마 같은 이유)
3년 전부터 UCSF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K는 살가운 안부인사와 스몰토크를 중요시하는 듯한 샌프란시스코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서 초반에 꽤 애를 먹었다고 했다.
"말이 없거나 Shy 하면 여기 사람들은 무슨 성격장애로 아는 것 같아. 너처럼 사교적인 사람이면 잘 적응할 텐데~"
나의 사교성을 높게 사는 K에게 'How are you'에도 단박에 당황해서 커피이름도 까먹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민트 모히토 커피 사건'만 봐서는 못 믿겠지만, K의 말대로 나는 꽤 사교적인 편이다. 몇 주 전에는 처음 보는 식당 직원에게 목소리가 뮤지컬 배우 같다고 칭찬했고, 그전에는 맥주를 가져다준 호프집 아르바이트생에게 눈웃음이 예쁘다고 쓸데없이 말을 건 적도 있다. 그러니 샌프란시스코 인싸들의 인사를 잘 받아내지 못했던 것은 순전히 내 영어실력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오랜만에 영어 환경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코로나로 단절된 세계는 나에게서 그나마 연간 몇 회 안 되던 외국인과의 소통마저 앗아가 버렸다. 코로나 이전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하면 소통창구 역할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호주에서 어릴 때 잠시 살았다는 것과 중고등학생들에게 과외로 영어를 가르친다는 것이 영어 소통을 도맡는 이유였다. 물론 그 회화실력도 근근이 길을 물어 찾고, 제대로 된 물건값을 계산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수능 영어를 가르친다고 해서 영어회화도 잘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마치 연애소설을 많이 읽었다고 반드시 연애 고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행 갭이어로 내 영어회화능력이 점점 더 비루해짐에도 불구하고, 경각심 없이 마음을 푹 놓게 했던 존재들이 샌프란시스코에는 둘이나 있었다. 앞서 말한 K는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3년째 샌프란에 살고 있었고, 일주일을 함께 보냈던 J 역시 보스턴에 살다가 샌프란에 산지 3년 차가 되었다고 했다. 나의 여행지에 일상을 보내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여행하는 마음을 무척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목적지를 잘 아는 친구와 걷다 보면 주변을 잘 살필 생각 없이 넋 놓고 친구 꽁무니만 따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여행 준비를 할 때는 나름 꼼꼼했는데, 샌프란 여행 중에는 기민함이 거의 0에 수렴해서는 '여기사는 친구들이 챙겨주겠지~'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궁금한 것이나 원하는 것은 친구한테 말하면 다 통역을 해주었다. 주문할 때도 늘 한걸음 뒤에서 친구가 얼마나 유창하게 주문을 하는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너무 친구들에게 의지를 했나? 왠지 더 무능해진 나는 혼자 돌아다니는 낮시간에 긴장을 하다가 'How are you?'라는 인사말에도 순간 소심해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좀 부끄러웠다.
제일 긴장했던 것은 PCR 검사를 하러 갔던 일이었다. 입국을 위해서는 72시간 전에 PCR 검사를 해야 했기에 낮시간에 혼자 우버를 타고 무료검사를 해주는 쇼핑센터에 찾아갔다. 우버 기사에게 드라이브 스루를 지나가야 한다고 설명해야 했고(퀘스트 1) 검사가 끝나면 목적지 위치를 바꾸겠다고 설명해야 했으며(퀘스트 2) 예약을 하고 갔지만 도착해서는 내 이름이 명단에 없다고 해서(퀘스트 3) 또 잔뜩 긴장한 상태로 영어 몇 마디를 주고받아야 했다. 말이 안 통할 시에는 전화를 바꿔달라고 친구가 당부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검사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우버택시는 검사를 하러 갈 때와 똑같이 베이 브리지 위를 달렸다. PCR 검사가 아니었다면 여행 계획에는 없었던 오클랜드를 오가는 투어였다. 그제야 눈에 보이는 차창 밖의 풍경이 꽤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마음은 모든 퀘스트들을 혼자서도 잘 해냈다는 성취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www.walgreens.com
Walgreens과 COLOR 홈페이지에서 무료 PCR 검사 예약이 가능하다. 드라이브 스루이기 때문에 차를 타고 가야 하며, 자가용이 없는 경우에는 우버를 타고 가서 검사를 받을 수 있다.
물론 편하게 해주려는 친구들 덕분에 잘 먹고 잘 놀다 와놓고선 이제 와서 '너네 때문에 영어 쓰고 싶어도 못썼어!'라고 황당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가이드가 있어서 얼마나 편했는지... 감사합니다.) 그저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구나'하고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여행이 주는 적당한 긴장감과 소소한 성취감은 우리를 자꾸만 미지의 세계로 떠나도록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How are you?'라는 카페 점원의 인사에 살짝 긴장해서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오늘은 미국 사람이랑 영어 한마디 썼다!!'라고 하찮고 귀여운 성취감을 느꼈던 그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