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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Jan 31. 2021

엄마는 파타야 여행을 가기 전에 곰탕을 끓였다.

엄마와 함께했던 3박 4일 파타야, 방콕 여행

밤 12시가 넘은 시간, 수완나품 공항의 입국장에는 태국인보다 한국인이 훨씬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 한국을 출발한 방콕행 비행기가 유독 밤 시간에 많은 탓이었다.


 ‘설마 이미그레이션에서 붙잡히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불안한 상상을 하며 나는 자동문에서 한국 관광객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20분째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는 그날 육십 평생 난생처음 혼자서 비행기를 탔다. “우리가 여기서 엄마 잘 보낼 테니까~ 너가 거기서 잘 받아~” 인천공항에서 언니는 나에게 메시지를 남겼고 엄마를 출국장에 들여보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비행기에 한국사람이 많으니 꼭 잘 쫓아다니라고 당부를 하면서. 이미 보호자 역할이 바뀌기 시작한 모녀 사이였다.


다행히 나는 엄마를 잘 받았다. 엄마는 나를 발견하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과 서로 좋은 여행을 빌어주며 작별인사를 했다. 비행기에서 엄마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태국 시간으로 새벽 한 시, 한국은 이미 세시를 지나고 있었다. 기다려온 휴가를 맞이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엄마는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엄마가 신나게 휴가를 기다려온 것은 아니었다. 내가 파타야 리조트에 가자고 말을 꺼냈을 때 엄마는 절대 갈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일은 어떻게 하고 내가 거길 가니? 엄만 못 간다."


호찌민에 사는 친구를 만나서 4일간 여행을 하고 방콕에서 또 다른 친구를 만나 파타야 리조트에서 여유로운 휴가를 보내겠다는 것이 원래 내 계획이었다. 그런데 파타야 일정을 함께하겠다던 친구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비행기표를 취소했고, 파타야 리조트는 환불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나는 넓은 리조트를 혼자 즐기고 싶지 않았고 필사적으로 엄마를 꼬셨다.


“엄마 파타야 바다색이 어떤 줄 알아?, 이 풍경 좀 봐  엄마 거기 가면 4일 동안 밥 안 해도 돼. 인생 짧은데 엄마 무릎 건강할 때 여행 다니셔야지!!”

인생관까지 들먹이며 열심히 설득하면 엄마는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몇 시간 만에 “아니다 아니다, 엄마는 못 간다.”라고 수차례 번복을 했다.


파타야에 가면 엄마는 이틀간 일을 쉬어야 했다. 그 이틀은 엄마의 월급에서 25만 원을 차감시킬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일하지 않아서 받지 않는 돈’이지만 엄마의 계산법으로는 ‘돈 쓰고 쉬면서 그마저 빼앗기는 돈, 25만 원’이었다.


엄마는 기회비용까지 비용처리만 확실한 사람이었다. 리조트는 이미 돈을 지불했고 나머지 여행경비는 나와 언니가 모두 낸다고 했는데도, 엄마의 확답을 받아내는 것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25만 원, 모두 그 돈 때문이었다. 그래도 결국 밤낮 이어지는 설득에 못 이겨 엄마는 곰탕을 끓였고 조그만 여행가방에 짐을 챙겼다.


케이프 다라 리조트의 테라스는 파타야의 옥빛 바다를 향해 열려있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한 관광객들이 보트나 유람선을 타고 혹은 줄에 매달려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조식을 먹고 바닷가로 산책을 갔다. 평소 같으면 찍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을 텐데, 엄마는 리조트의 산책로에서 연신 포즈를 취해 보였다. 그리고는 콜럼버스라도 빙의된 양 열심히 전진하며 나에게서 멀어졌다. ‘아니, 저렇게 좋아할 거면서 왜 그렇게 버틴 거야?’ 신난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뿌듯했고 또 그게 짠해서 내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졌다.

리조트가 맘에 들었던 엄마는 지금도 가끔 그곳 이야기를 한다.

늘 가성비를 따지는 엄마에게 태국의 물가는 꽤나 만족스러운 것이었고 쇼핑이라고는 언니를 준다고 산 작은 귀걸이가 다였다. 고로 여행은 모두 성공적인 것만 같았다. 딱 하나, 방콕 시내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제외하면.


그날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끌렁떠이 시장에서 툭툭을 탔다. 방콕의 더운 공기를 가르며 매연을 잔뜩 마시고 씨얌 시내에 도착했을 때 엄마와 나는 모두 지쳐있었다. 나는 고급 요리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었고, 고민 끝에 ‘MK’라는 레스토랑의 프리미엄급인 ‘MK Gold’를 찾아갔다. 그곳은 스키야키와 샤브샤브 전문점이었다.   


엄마는 호화스런 레스토랑 입구에서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메뉴판을 손에 쥐고는 더욱더 그랬다. '아 엄마한테 환율을 알려주지 말걸..' 나는 엄마의 표정을 보자 피로가 몰려왔다. 한국에서도 가격이 비싼 식당에 데려가면 연신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맛도 더럽게 없으면서 가격만 비싸다'라고 불평을 하는 엄마였다. 내가 보기에 '맛도 더럽게 없다'는 것은 진짜 맛 평가라기보다 비싼 가격 때문에 복수심에 붙인 수식어일 뿐이었다.


내가 수박주스가 맛있다고 권했지만 엄마는 물만 마시겠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순간 주스값도 아낀다는 생각에 나는 참았던 속이 터져버렸다. 여행을 가자고 설득하면서부터 계속되어온 궁상맞은 엄마의 태도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화였다. 그 뒤로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엄마가 좋지 않은 내 표정을 보고 어색하게도 불평 없이 식사를 했다. 펄펄 끓는 육수에 들어간 야채와 소고기는 금방금방 익었고 우리는 빠르게 불편한 식사를 마쳤다.

여행 마지막날 방콕의 노을


우리는 무사히 3박 4일 파타야, 방콕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아빠와 언니는 엄마의 곰탕보다는 치킨이나 중국음식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주부로 돌아온 엄마는 파를 썰고 곰탕에 밥을 말아 배추김치와 함께 상을 차렸다.


나는 곰탕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생각했다. 엄마의 인생은 샤브샤브보다는 곰탕 같다고. 엄마라고 좋은 것, 비싼 것이 싫겠는가. 엄마는 참는 것이다. 어느 날 한숨 쉬듯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돈 벌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나이 들어서 자식들에게 부담되고 싶지 않다고. 국물이 우러날 때까지 인내하고 인내하는 곰탕 같은 인생이었다. 그리고 그 우러난 국물마저도 자식들에게 모두 덜어주려는 인생이었다.


때로는 답답해서 속이 터지고, 살아온 세월의 무게 때문에 엄마의 생각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내가 더 열심히 잘 벌어볼 것이다. 돈이 무서운 엄마가 곰탕뿐만 아니라 샤브샤브도 먹고 수박주스도 먹고 여행도 고민 없이 갈 수 있도록. 내가 더 잘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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