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머리를 맞대고 연애 고민
여자 둘, 남자 하나로 구성된 자문단의 결론은 ‘더 이상 먼저 연락하지 말라’는 거였다. 맥주 맛이 쓰고 속이 허했다. 안주가 변변치 않아서 그런가. 하지만 우리 자문단은 다른 안주가 더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보단 내 연애 고민을 곱씹어보는데 더 열중이었다. 만나면 무척 유쾌하고 다정한데, 그의 연락이 왜 성에 차지 않는 걸까. 내가 연애 상담을 시작하자, 그때부터 그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쓸데없이 디테일한 표정이나 몸짓들도 자문단의 분석대상이 되었다. 네가 그렇게 말할 때 그 사람 표정이 어땠는데? 그가 아직 충분히 가깝지 않다고 생각해서 연락에 조심스러운 거 아닐까? 만나면 항상 분위기 좋다며? 그럼 연락 오겠지. 사람이 바빠 보여야 매력이 있다니까. 몇 번이나 만난 건데? 진지하게 생각하느라 몇 번 더 만나보려 하나 보지. 그의 연락 빈도를 두고 잔과 잔들 사이에 많은 말들이 오고 갔는데, 아주 작은 파편 같은 이야기들까지도 자문단의 평결에 힘을 싣고 또 빼앗아왔다. 결국 각자 분석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자제하고 가만히 기다려봐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자문단의 단톡방은 누군가의 연애가 잘 안 풀릴 때마다 유독 시끄러웠다. 각자 연애 횟수가 늘어나면서 가설과 이론은 더 날카롭게 자문을 구하는 자들을 찔렀으나, 본인이 자문을 구하기 시작하면 여지없이 뭉뚝하게 미련을 떨기 마련이었다. 나도 미련 둥이처럼 보였을까? 사실 자문단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그 현장감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좀 억울했다. 그 남자랑 둘이 있으면 느껴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니까!! 담배 피우는 것 싫어하시죠? 제가 끊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나를 보고 배시시 웃었단 말이다. 첫 만남에서 바로 그다음 약속을 잡았던 것도 그였다. 그리고 바로 지난주에는 내가 전시회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같이 한번 가면 좋겠다고 그가 내 말을 받아쳤다. 물론 전시회 티켓을 들이밀며 같이 가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촉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나는 어서 나를 위한 연애 자문단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결국 그 남자랑 사귀게 되었어 얘들아’하고 발표하는 그날만을… 그러면 진심 어린 우리 자문단은 ‘정말 잘됐네’라고 말하고 ‘의왼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연락 자제'를 조언받은 나는 그 후로 정확히 2박 3일간 그 남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했다. 여름휴가에서 그와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바다에 내던져버렸기 때문이다. 호이안 해변의 파도는 멀리서부터 하얀 포말을 높게 만들어 해안을 깊숙이 덮쳐왔다. 내 휴대폰은 파도에 밀리고 바다에 잠겼고, 제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자문단의 조언을 실천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켜질 줄 모르는 깜깜한 휴대폰 화면을 대책 없이 바라보며, 마음도 멀고 몸도 멀리 있는 그 남자를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연락두절을 그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호이안에서도 나는 우리 자문단과 함께 였다. 베트남 맥주를 손에 쥐고 망고를 씹으며 우리는 또 각자의 예측을 내놓았다. 그에게서 연락이 와 있을까? 아직 충분히 가까운 관계도 아니었는데, 이참에 관계를 정리하자는 싸인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한국에 도착해서 바삐 열어본 PC카톡에는 이틀에 걸쳐 그의 메시지가 서너 개가 와있었다. 잘 놀고 있냐는 메시지 밑으로 연락이 없으니 걱정된다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그리고 바로 어제 날짜로 한국에 오면 연락 달라는 마지막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나는 지체 없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메시지를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온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자문단 단톡방에도 얼른 결과를 보고했다. 그럴 줄 알았어, 다행이네,라고 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한 명이 나에게 ‘축하’를 했다. 고대하던 그의 연락을 받은 것은 다행인 일이었지만, 축하까지 할 일이었나? 친구들의 회의적인 시선에는 억울해했다가, 반대로 낙관적인 말을 듣자마자 덜컥 불안해졌다. 연락이 없으니 걱정된다는 메시지를 '너를 좋아해'라는 식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는 것일까? 나는 또 물음표를 띄웠다. 연애란 원래 이렇게 답 없는 상태의 연속이었던가?
‘결국 그 남자와 사귀게 되었어, 얘들아'라고 자문단에게 선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막판에 엎어져버린 그와의 관계에 대해 자문단은 역시나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지만, '어쨌든 그가 좋아하는 마음이 크지 않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추론들 중에 가장 명확해 보이는 추론이었다. 자문단은 깊이 안타까워했지만, '역시 그럴 줄 알았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나보다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보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진짜 잘 될 것 같다고 김칫국을 마셨던 게 창피해졌다. 촉이 좋기는 개뿔... 놓쳐버린 남자나 망해버린 관계보다도, 오작동하는 내 연애 안테나 때문에 좌절스러웠다. 내가 은근히 낙관하고 있던 관계는 유효한 예측이 아니라 간절한 소망이었을 뿐이다. 잘되고 싶으니까 그저 유리한 단서만 이어 붙여보면서 나 자신도 속였고 그래서 스스로 속은 게 창피했다.
돌아보면 내 연애에 역전은 없었다. 내가 친구들에게 너절하게 상황을 묘사하며 고민하고 자문을 구할 때마다, 그 연애는 맺어지지 않았다. 조언을 해준 친구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자문단이 출범한 연애는 이미 가라앉고 있는 배였고 이미 틀려버린 시작이었다는 말이다. 연애 자문단은 종국에 '위로단'일뿐이었고 집단지성은 언제나 ‘집단 지송ㅠㅠ’으로 마무리됐다. 반대로 맺어질 연애라면 잡음 없이(자문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적어도 주변 사람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 따위는 없이 자연스럽게.
몇 주 전, 친구들 단톡방에 고민 하나가 올라왔다. 연애 사업에서 한동안 실망과 거절의 쓴 술만 들이켜던 친구가 드디어 이상형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통 상대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심란하다는 데자뷔 같은 말을 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금 자문단을 발족하는 건가? 그렇다면 자네는 이미 글러먹었군’이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의 연애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가 정말 어느 날 우리 자문단 앞에 나타나서 ‘결국 그 사람과 사귀게 되었어, 얘들아’하고 승전보를 울리게 되지는 않을까? 우리끼리만 추측해보는 수많은 자문단의 질문들처럼 그 해답은 결국 연애 당사자들에게 있다. 나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것, 그의 연애 역전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사진출처 : MBC 오은영 리포트
*해당 글은 네이버 포스트 연애결혼에서 ‘연애의 기쁨과 슬픔’으로 연재중인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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