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더 좋아하면 ‘을’인가?
코랄핑크가 좋을까? 아니면 말린 장미색? 나는 데이트에 앞서 입술색을 고민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았고 주말이었으며, 무엇보다 2주 만에 남자친구를 만나는 날이었다. 욕실과 화장대 앞을 오가며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은 평소에 비해 그리 유난스러운 일도 아니었는데, 오래간만이어서 그랬던 걸까? 지켜보고 있던 엄마가 괜히 한소리를 한다.
“우리 딸, 남자친구 엄~청 좋아하나 봐? 솔직히 네가 더 많이 좋아하지?”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누가 더 많이 좋아하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엄마를 쏘아보며 못 참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걔가 나를 더 많이 좋아하거든?"
나는 온갖 현명한 척을 하며, 연인사이에 마음의 수위는 고정되어있지 않고 흐르며 변하는 거라고(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엄마를 가르치려 들었지만, 역시 내가 더 많이 좋아한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연애 역사를 되돌아보자면 ‘을’이 되거나, ‘약자’로 묘사되는 것은 언제나 더 마음이 큰 쪽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을’ 또는 ‘약자’가 될 때마다 나는 불행했다. ‘남자가 더 좋아할 때 연애든 결혼이든 안정적일 것이다!!’ 무조건이라고 우길 수는 없지만 나는 어렴풋이 이런 결론을 내렸고, 그것은 더 사랑했고 그래서 더 불행했던 경험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니 팬클럽이니?"
따져 물을 만큼 바쁘던 사람을 만나던 적이 있었다.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내가 그와의 만남을 고대하는데 반해 그의 태도는 그저 팬서비스 수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던 연애. 그를 생각하면 아주 낯선 장소에서 그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기억만이 뚜렷하다. 새벽 한 시를 넘은 시간, 일산의 구석진 동네, 사방은 어둡고 단지 몇몇 건물의 작은 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안개처럼 새어 나오는 그런 장소였다.
"오래 걸릴 일은 아니야"
나는 낯선 그곳에서 차를 세워두고 두 시간을 꼬박 기다렸다. 어두운 차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라디오를 켜놓고 그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뿐. 그 일이 끝난 것은 새벽 세시가 넘어서였다. 그리고 지친 그를 태우고 함께 허름한 모텔에 들어갔던가? 아니면 야식을 먹으며 그의 불만을 들어줬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생각해 보니 팬클럽보다는 매니저에 가까웠군?) 그냥 오랫동안 그를 기다렸던 기억만이 뚜렷하다. 그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일 때문에 나는 종종 그를 몇 시간씩이나 기다려야 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기꺼이 더 많은 시간을 상대에게 쓰는 것은 당연했으므로. 자발적인 기다림은 자주 일방적인 애정표현이 되었고, 나의 섭섭함은 자주 그의 갑갑함이 되었다. 결국 자존심 문제였겠지만, 더 많이 좋아한다는 이유는 좋아하기를 그만둬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이다. 무척 모순적인 일이었지만 정말 그랬다.
수년 전, 내가 더 많이 좋아했던 또 한 사람은 차라리 일 때문에 바쁘길 바랐던 적도 있었다. 우리는 꽤 먼 거리를 오가며 연애를 했는데, 그가 서울에 오면 나는 한 2순위, 아니 3,4순위쯤? 어쨌든 연애의 아주 초반을 제외하고 내가 우선순위에 놓였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넉 달을 만나면서 내가 그의 휴일을 독점하던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가 바쁜 이유는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은사님을 만나는 자리라던가, 해외에서 오랜만에 들어온 친구와의 모임, 가족들과의 라운딩약속 등등 다채로운 이벤트들이 있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역시 더 이해해야만 했다. 억지 이해라도 없으면 괴로운 건 그저 나뿐이었다. 나는 그의 중요한 이벤트들 사이에서 5,6순위로 밀려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미련하게 그의 옆에 붙어있었다. 물론 머지않아 굴욕감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어쩔 땐 그가 바빠서 서울에 오지 못한다는 소식이 오히려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 내가 후순위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어떤 날은 짐짓 모른 척 그가 모임이 있다는 논현역을 가까이 지나쳐갔었다. 굳이 얼굴 한번 보겠다고 자존심을 버려가며 그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이제는 보내줘야겠다. 많이 좋아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마음까지 좋아할 수는 없다'라고 나는 생각하며 마지막을 준비했던 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짧은 시간도 내게 우선순위를 내주지 않았고 우리는 그대로 헤어졌다. 다음 날 그에게 온 장문의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았다. 넉 달간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굴었냐고 한다면, 그는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그 한 가지 때문에 그가 완벽하게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바보같이 모르고.
얼마 전, 여자가 더 좋아해야 연인사이가 더 오래간다는 연구결과를 접한 적이 있다. 내 정서상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는데, (해외 연구 결과라서 그런가?) 어쨌든 수치가 증명하고 있으니 반박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종종 사람들은 '연애는 여자의 승낙으로 시작되고 결혼은 남자의 결심으로 이루어진다'고들 말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나 좋다는 사람을 만나서 맺어져도 결국 더 안정적인 관계로 돌입하기 위해서는 남자의 마음이 더 커야 한다는 말이다. 정확한 수치는 없지만 나는 경험에 비춰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완전히 이기고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역전당하는 연애는 늘 괴롭게 끝났다. 역시 남자가 더 좋아해야 해..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결혼한 친구들도 이 생각에 동의할지 궁금해졌다. 요즘 육아가 한창인 친구들 몇 명에게 물었더니, 다행히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매우 동의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혼은 보통 남자가 더 좋아서 서둘러야 진행도 빠르고 나중에 탈도 없는 게 아닐까? 그건 다들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사실인 것 같아"
그렇다면 나는 문득 연이어 궁금해진다. 그녀들은 결혼 후에도 '누가 더 좋아하는지' 생각해 봤을까? 내가 묻자 유부녀들의 하나같은 대답.
"아니~ 그런 생각은 안 하고, 누가 더 집안일을 많이 하는지, 누가 더 억울한지, 이런 건 생각해 봤지 ㅋㅋㅋ"
이쯤 되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헷갈리게 된다. 남자가 더 좋아해야 안정된 관계라고 했지만, 나는 안정된 관계 속에서는 내가 흔쾌히 더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계에 불만이 생겨야지만 마음의 크기를 견주어 보는 것일까? 마음의 크기가 다를 때 결국 관계에 불만이 생기는 것일까? 경험을 하고, 연구 결과를 보고, 유부녀 선배님들에게 인터뷰를 해봐도, 역시 남녀문제는 어렵다. 역시 잘 모르겠다. 그저 앞으로는 돌려받지 못할 마음을 미련하게 주는 일이 없기를 바라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