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여자분 나이는 38, 상도동 거주, 서울소재 **대학교 졸업, 영어강사일 하다가 쉬는 중” 프로필을 읊어 보내자, 1이 사라지고 얼마 있다가 당분간 소개팅은 하고 싶지 않다는 지인분의 답장이 돌아왔다. 둘이 나이대도 비슷하고 사는 곳도 멀지 않아서 꽤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말이다. 그간 몇 차례 소개팅을 하며 지쳐버린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도 얼마나 지치는 세월을 보내왔던가. 마음을 주는 일만큼, 주려고 시도하는 일 자체도 지치는 일이니까. 그때 나는 그런 줄로만 이해하고 소개팅 주선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 지인분과 모임에서 다시 만나 맥주를 마셨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분은 소개팅을 거절했던 이유를 솔직히 말했다. ”일을 하다가 쉬는 중이라는 것이 좀 걸렸어요. 저는 일이 맞지 않으면 그만두고 쉬는 시간을 가지고 그러는 편이 아니라서 성향이 맞을 것 같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너무 까다롭다고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들끼리 만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상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언제나 더 보수적인 것이 될 수 밖에는 없다. 소개팅 전에 남자들은 무조건 ’ 예쁘냐?‘라고 묻는다지만, 중요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직업은 돈벌이뿐만이 아니라, 살아온 궤적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데 좋은 도구가 된다. 어떻게 그 일을 하게 되었는지, 그것은 삶에 대한 가치관일 테니까.
소개팅 어플에서 만난 남자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변변한 것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중 가장 독특했던 직업을 꼽자면, 그것은 단연 ‘전문 도박사’였다. 이제는 연진이를 연신 부르며 복수의 칼날을 가는 송혜교가 ‘얼마면 돼? 얼마면 되는데?’라며 거칠게 묻는 원빈에게 앳된 얼굴로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하고 묻던 시절이 있었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이병헌은 호쾌하고 대범하게 포커 테이블에 인생을 건다. 드라마 ‘올인’은 ‘도박’도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가 포커 플레이어라고 말하자 나는 단번에 그 드라마를 떠올렸고, 그는 그것이 나를 이해시키기 제일 쉬운 방법이라는 듯 ‘이병헌이 하는 일과 비슷하다‘ 고 설명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프로게이머에서 포커 플레이어로 전향하고 세계권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는 친숙한 유명인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그는 낯설거나 독특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프로필 사진 속에 그는 부드러운 크림 반죽 같은 붉은 바위 사이에 두 팔 뻗고 서있었다. 미서부의 상징과도 같은 그랜드 캐년과 엔텔롭 캐년을 배경으로 찍은 몇 장의 사진들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 그곳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사막 위에 지어진 화려한 카지노들이 그의 작업장이자 일터였을 것이다. 그는 서울 시내에서도 카지노 가까이에 살았다. ‘거기는 외국인만 출입할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묻자, 그는 지구반대편의 어느 개발도상국에서 시민권을 땄노라고 말했다. 라스베이거스는 가보지 못했지만 가까운 나라 마카오에서 구경했던 화려한 카지노를 떠올려보았다. 담배 냄새와 방향제 냄새가 뒤섞인 드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려있고, 그가 테이블에 앉아 신중하게 카드를 집어 올리는 상상 따위 말이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하루에 수백만 원, 아니지, 수천만 원을 딴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지능이 엄청 높은 사람이겠지? 그래도 도박을 좋아한다는 것은 위험한 것 아닐까? 그의 모든 이력들은 나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더해져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에겐 어떤 호기심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역시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와의 만남은 3주를 넘기지 못했다. 예상대로 한동안 그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차분한 얼굴을 하고 호기심에 묻는 내 질문에 부끄러운 듯 성실히 대답을 해주었다. 도박사라는 직업과 다르게(나의 편견과 다르게) 착하고 착실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멘사 회원이라는 것과 매일 명상을 한다는 것, 불교교리를 배운다는 것 등등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내가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시나요?’라고 묻자 처음 듣는 질문이라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포커 플레이어라면 만나는 사람마다 들을 법한 질문인데, 어째서? 아무튼 나는 그가 신기하지 않아 졌을 때부터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며, 아쉽게 개그코드마저 달랐다. 아마 그도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생각 한다. 역시 드라마를 상상하고 기대하며 시작하는 건 여러모로 좋지가 않다.
‘전문 도박사‘만큼 이름이 임팩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직업에 자신의 가치관을 진하게 담고 있던 남자도 한 명 있었다. 국제석유거래소. 생소해서 얼마나 특이한지 가늠이 안 가는 직업이었으나, 그의 생활패턴을 보자면 세상 그렇게 특이한 직업이 없었다. 한 달에 해외출장이 25일 정도 된다고 했다. 집세가 아까워서 어떻게 사나…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서 그가 한국에 몇 주 지내는 일정 중에 나와 매칭이 된 것이었다. 나를 만나서도 그는 해외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런 그와 연애를 꿈꾼 거냐고? 당연히 호기심이 우선이었다. 그래도.. 사람일은 모르는 거 아닌가…? 특이한 그의 이력에 끌렸다는 건 부인할 수가 없다. 무려 5개 국어를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는 본인 직업에 대해서도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매일 출장을 가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잘 몰랐지만, 대단하기는 대단한 일인 듯 들렸다. 물론 사기꾼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만나자는 연락을 했을 때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청년처럼 보였다. 연봉을 묻진 않았지만, 집에 닷새도 머무를 수 없이 바쁜 일이 푼돈을 버는 일일 리가 없었다. 그는 40살에 은퇴하고 파이어족이 되려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다. 은퇴를 하면 세금이 적은 싱가포르에서 살 것이라고 했다. 한국은 세금을 너무 많이 내야 한다고, 구체적인 수치를 자세히 얘기해 주는데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는 곧 그가 계획한 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 모든 얘기들은 그에 대한 매력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였다. 나에게 그는 성공과 돈에 몹시 집착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모든 대화의 초점은 오로지 성공과 돈이었다. 역시 그래야 성공하나?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그보다 덜 성공해도 좋다. 나는 그가 늘어놓은 성공한 인생에 대해, 완벽한 계획에 대해 들으며, 오늘의 행복은 그의 안중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강하게 성공하고 싶다는 집착은 현실이 불만족스럽거나 행복하지 못한다는 반증일 테니까. 시간이 없는 바쁜 남자여도 사랑한다면 어느 정도 감안이 되겠지만, 성공과 삶에 대한 가치관이 안 맞는 남자는 애초에 사랑할 수 조차 없는 것이다.
역시 평범한 것이 가장 어렵다고 했던가? 비범한 사람들 중에 맞는 사람을 아직 찾지 못해서, 평범한 직업에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이상형이 된 지 오래다. 그래도 ‘전문 도박사’나 ‘국제 석유 브로커’를 이따금 떠올리면 신기하고 재밌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