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쓰한 Sep 10. 2020

#2 스무 살, 붉은 악마들 천사를 만났다.

자전거 국토대장정

https://brunch.co.kr/@cheerssally/41


부산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버스 짐칸에서부터 내렸다. 4시간 반을 접혀서 달려온 자전거들이 차례로 땅에 세워졌다. 첫 번째 목적지는 해운대였다.


그런데 건이의 자전거 페달이 이상했다. 체인이 빠진 것 같은데 끼우면 바로 다시 빠졌다. 우리 중에 자전거를 손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우리는 일단 해운대 가까이에 도착한 김에 바다 구경을 먼저 하고 자전거 수리점을 찾기로 했다. 수리점에서 자전거를 고치면 내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국토대장정을 시작하는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넷 다 악마 뿔을 열심히 팔았을 때 입었던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것이 말하자면 우리 단체복이었던 것이다. 월드컵이 다 끝난 (그것도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하지도 못한) 상황에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있는 네 사람은 좀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런데 해운대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더 강력한 인물이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해운대에 있는 그 아저씨와 우리 네 명을 보고서, 아마 그 아저씨가 우리의 대장이라고 모두가 생각했을 것이다.


아저씨도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계셨다. 하지만 대장은 더 특별했다. 태극기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얼굴에 태극기 문양 타투 스티커를 붙였고, 자전거에 크고 작은 태극기를 여러 개 달고 계셨다. 아저씨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태극기 아저씨’라는 제목으로 나오셨던 인물이었다. 자전거에는 본인이 출연했던 ‘세상에 이런 일이’ 화면이 캡처되어 붙여져 있었다. (2006년였기에 태극기 부대가 생기기 훨씬 이전)


아저씨는 따뜻한 미소를 띠며 커다란 태극기를 한 손에 들고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말없이 우리 머리 위에 태극기를 펄럭이셨다. 우리끼리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이상한 아저씨라는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아저씨의 미소나 행동들에 전혀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다.


자전거로 여행을 하고 있고 부산에서부터 강릉까지 갈 것이라고 아저씨에게 말했다. 숙소는? 아저씨가 물으셨다.


보름 동안 우리는 숙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고 당일에 적당한 곳을 찾아서 어디서든 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만 짐 풀 곳을 찾자는 것이 숙소에 대한 유일한 계획이었다.


아저씨는 부산에서 특별히 잘 곳이 없다면 본인 집에서 하룻밤 재워주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감사합니다! 외치고 우리의 대장을 따라나서려던 참에 우리는 건이 자전거가 말썽이라는 것을 아저씨에게 알렸다. 아저씨는 태극기 자전거 대장이니까 당연히 자전거 수리점을 잘 아셨다. 그리고 자전거 수리비용을 본인이 지불하고 나오셨다. 우리가 내겠다고 계속 말씀드리는데도 얼마 안 나왔다며 손사래를 치셨다.  


아저씨네 집은 해운대에서 멀지 않은 주택단지였다. 갑자기 애들 네 명을 집에 초대했다고 하면 아내분이 싫어하시지 않을까? 우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그날 그 아저씨네 집에서 아주머니가 차려주신 진수성찬 대접을 받고 후식으로 과일도 받아먹었으며, 서울 있다는 아저씨의 큰 아들방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방주인의 사진을 보면서 나는 연신 잘생겼다는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잘 자고 일어나서 우리는 아주머니가 차려주신 식탁에서 아침까지 든든하게 먹었다. 그리고 가다가 배고프면 점심으로 먹으라며 주먹밥까지 챙겨주시는걸 받았다. 우리는 감사하고 너무 감사해서 죄송했다.


아저씨는 우리가 해안도로를 따라 울산으로 가겠다고 했더니, 송정 넘어 기장까지 우리를 배웅하겠다고 하셨다. 그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 내내 진짜로 아저씨는 우리들의 대장이었다.


“나는 여기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젊은이 여러분 행복하고 건강하게 여행하세요.”


귀인이었던 태극기 아저씨와 작별하고 나서도 우리는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울산에서는 오토바이를 타는 아저씨를 만났는데, 우리가 차도에서 운전하는 것이 위험할까 봐 울산시내를 통과하는 내내 우리 앞에서 길을 안내해주셨다. 그리고 우리 걱정을 많이 해주셨다.


“세상 위험하니까 주머니칼이라도 차고 다녀라, 너희들. “


이제는 너무 옛날이라 어느 지역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날은 교회에서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올렸고 어떤 날은 절에서 일어나 발우공양을 했다. 마을 주민들의 배려로 마을회관에서 잔적도 있고, 어떤 절에서는 심지어 주지스님 방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그곳 분들은 모두 우리의 끼니를 걱정하고 챙겨주셨다. 나는 그들에게 크게 빚을 지고도 서울에 돌아와서 갚을 생각 한번 안 한 것이 아직도 부채감이 든다. 주소라도 알아와서 추석이나 설에 감사편지라도 보낼걸.


멋진 도전. 떠나기 전에 나는 여행을 기획하고 도전하는 나 스스로에 심취해서 실제 여행이 어떨지는 구체적으로 예측해보지도 않았다. 계획도 대책도 없이 떠났던 여행을 멋지게 만든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지만 스토리를 호러가 아니라 동화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른 모든 등장인물 덕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 등장인물들의 핵심에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 젊은 국대 멤버들 경이, 도비, 그리고 건이가 있었다.


3편에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1 스무 살, 악마를 거래하고 여행을 떠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