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국토대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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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획은 내가 했지만 경이와 도비, 건이 그리고 나 넷 중에 가장 체력이 약한 것은 나였다. 도비가 1번, 경이가 2번, 내가 3번, 그리고 건이가 뒤에서 내 속도에 맞춰 따라와 주었다. 너무 힘들 때는 내 자전거만 무거운가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었고 나중에는 내 짐들도 건이와 도비가 나눠 들어주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힘이 들면 단계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나는 그때 알았다.
처음 며칠은 예상만큼 힘든 여정에 깜짝 놀란다. ‘헐. 야, 너무 힘든 거 아니냐?’ 그래도 참을 만은 한 것 같다. 삼사 일째가 되면 ‘와 진짜 존나 힘들다’라면서 서로의 땀범벅된 얼굴을 마주 보며 웃는다. 웃다가 욕하고 그러다 또 웃으며 욕한다. 그 뒤로는 침묵이 시작된다. 힘들어서 말도 안 나온다.
여행 중에 우리가 가장 자주 했던 말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라는 말이었다. 고작 20살, 그 말은 시험 점수가 떨어졌을 때 상황을 무마하려고 엄마한테 써먹었던 게 전부였다. 그것을 몸소 느낀다는 것은 이렇게 언어로 표현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끙끙대고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죽을 맛이지만, 내리막길에서 페달 한번 안 밟고 거저먹는 그 기분은 몹시 유쾌했다. 자연의 이치와 그 속에 사는 인간의 삶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함께했던 내 벗들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은 진짜 힘들고 피곤할 때 무조건 본성이 나온다. 그래서 경이, 도비, 건이의 인성은 내가 죽을 때까지 보장할 수 있다. (보증을 서는 건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 기억의 오류인가 싶어서 물어봤는데 그들도 좋았고 웃겼던 기억 말고 다툰 기억은 없다고 했다. 배꼽을 잡고 웃었던, 행복했던 기억은 정말 한 트럭이다.
도비가 내 칫솔을 들고 비에 젖은 신발을 빨면서 ‘버려진 칫솔이 있던데?’라고 했을 때, 길에 떨어진 청양고추를 가위 바위 보 해서 먹고는 건이가 눈이 빨개져서 울었을 때, 그렇게 눈이 빨개져 우는데 지나가던 새가 건이 머리에 똥을 쌌을 때, 마을회관 밥솥으로 경이가 만들어온 주먹밥에서 오이비누 냄새가 났을 때, 오이비누 주먹밥을 먹고 이동거리 최고 기록을 달성했을 때, 찜통더위에 7번 국도를 달리는데 갑자기 바닷바람이 에어컨만큼 시원했을 때, 스마트폰 없던 시절이라 종이로 된 지도를 바닥에 깔아놓고 출발 위치와 현재 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사진을 찍었을 때.
다퉜던 기억은 아니지만 눈물이 핑 돌았던 적은 한번 있다. 매일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잠잘 곳을 찾아야 하는데, 겨우 찾아서 들어간 절이 공사 중이라서 재워줄 수 없다고 했다.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구원해주실 줄 알았는데.. 낭패감이 들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결국 그날은 예수님이 구원해주셨다. 교회에 누워서 '번갈아가며 도와주시니 다행이다' 나는 생각했다.
친구들이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숙소를 찾기 어렵거나 자전거로 달려야 하는 도로가 너무 위험할 때 무척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준비는 내 몫이었던 게 분명한 것 같은데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 역시 내 잘못 같았다. 하지만 친구들 모두 어떤 일도 웃으면서 받아들였고 다행히 모두 잘 해결해나갔다.
우리의 여행 계획은 보름이었고 우리는 9박 10일 만에 여행을 종료했다. 장마가 왔다. 매년 오는 장마였는데도 우리는 한국 장마의 위력을 우습게 봤다.
빗속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무릎이 까졌다고, 다시 일어나서 달리다가 같은 무릎을 아스팔트에 또 쓸었다. 넘어지는 순간 머릿속으로 내 무릎뼈가 다 보이는 상상을 했다. 우리도 북으로 열심히 달리고 있었는데 장마전선은 우리보다 빨리 북상했다.
울진읍의 허름한 모텔에서 우리는 짐을 풀었다. 영덕을 지났는데도 해안가에는 대게 전문점들이 많았다. 그때 도비랑 내 통장에 함께 아르바이트했던 크리스피 크림에서 월급이 들어왔었다. 우리는 대게랑 고민하다가 횟집에 들어가서 회에 소주를 먹었다.
다들 지쳤고 앞으로 삼척 방향으로 가는 길은 산길이 많았다. 장마 속에서 계속 자전거 국토대장정을 강행하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친구들이 내 눈치를 봤다. 체력이 가장 안 좋았던 나였기에 나도 두 손을 들었다. “포기하자. 여기까지 좋은 여행이었다.”
우리가 서울에 올라온 다음날 태풍 에위니아가 우리나라를 덮쳤고 전국의 677만 평이 물에 잠겼다.
자전거 국토대장정. 그 여행을 다녀온 지 14년이 지났고 그 세월만큼이나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다. 그것이 나를 바꿔놓았던가? 그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돌아와서 평소처럼 다른 이벤트를 열심히 기획했고 인경이는 곧 중국에 교환학생을 갔다. 그리고 건이는 해병대로 도비는 해군으로 각각 국토대장정보다 더 길고 힘든 여정을 떠났다.
아무리 대단한 도전이라고 해도 단 하나의 사건으로 단번에 나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 기억들은 차곡차곡 쌓이고 세월의 사유를 거친다. 그것들을 재료로 오랜 시간을 들여서 빚어내는 작품처럼 나는 바뀐다. 나는 그 기억들이 나만의 고전소설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의미가 너무 깊고 뛰어나서 절대 잊히지 않고 세월에 의해 검증되는 명작. 그래서 결국 그것들은 서서히 나를 바꿨고 깨닫게 했다.
이제는 모두 애엄마, 애아빠가 된 ‘젊은 국대 단원들’과 술안주로 명작을 꺼내볼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나의 이십대는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