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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Sep 09. 2020

#1 스무 살, 악마를 거래하고 여행을 떠났다.

자전거 국토대장정

20살의 나는 이벤트 기획자였다.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사실 ‘일 벌이기를 좋아했다’는 말이다.


3월에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자전거 국토대장정을 기획했다. 6월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출발할 것이고, 부산에서 강릉까지 자전거로 달리는 기간은 보름으로 잡았다.


싸이월드에서 지인들에게 인원 모집을 알렸다. 고맙게도 열몇 명의 친구들이 관심을 보여왔다. 당시 함께 크리스피크림도넛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이와 도비는 분명히 나와 함께 해줄 것이다. 만약 여럿이 아니더라도 외롭지는 않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결국 내가 크리스피크림 매장에서 국토대장정 브리핑을 할 때 함께한 친구들은 경이, 도비, 그리고 건이 셋이었다. 기획자인 나는 국토대장정의 단장을 자진했고, 우리 모임을 '젊은 국대'라고 명명했다. 우리 넷은 이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했다.


자전거 여행을 하려면 자전거와 여행경비가 필요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부터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다들 돈이 넉넉하지 않았고 부모님한테 손벌리기는 싫었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이벤트를 기획했다. 당시 2006년 월드컵이 독일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넓은 곳에 한데 모여 응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학습했다.


그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악마 뿔을 팔자.

내가 판매했던 악마뿔

나는 인터넷으로 악마 뿔 500개를 주문했다. 원가는 700원. 하나 당 2000원에 팔면 우리는 65만 원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전거도 사고 남은 돈은 여행경비에 보탤 수도 있었다.


2002년의 흥분을 기억했던 사람들이 평가전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16강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대비해서 가나와의 마지막 평가전, 그리고 조별리그 3개의 경기에서만 악마 뿔을 판매하기로 계획했다. 그전에 다 팔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우리는 동네였던 일산과 상암, 광화문에 가서 악마 뿔을 팔았다. 평가전 때와 토고전 때는 판매가 주춤했지만, 그 뒤로는 월드컵에 흥분한 많은 사람들이 신이 나서 악마 뿔을 사 갔다. 특히나 광화문에서는 길에서 판매행위가 금지되어 경찰이 단속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구매자들이 직접 우리를 찾아와서 귓속말로 가격을 물었다.


그러나 판매의 성공이 사업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경영실패로 인해 사업은 사실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기전까지는 판매자였지만, 경기 시작부터 월드컵을 즐기는 여느 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치킨을 먹었고 술을 마셨으며 심지어 판매를 도와줬던 몇몇 친구들에게도 한 턱을 쏘며 기분을 냈다. 결국 우리 손에 남은 돈으로 자전거를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황당하지만 자전거는 국토대장정을 반대하던 우리 엄마가 사주었다. (부모님한테 손벌리기 싫다던 나의 빠른 태세전환) 그리고 그 당시에는 자전거 도둑이 흔했고 그들 중 한 명이 내 친구였다. (자전거를 사려고 악마 뿔을 팔았다고 하면 내 또래 남자애들은 모두 ‘훔치면 되는데’하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그때는 흔한 일이었다.)


어쨌든 우리 넷은 엄마를 조르든 빌리든 훔치든 간에 각자 자전거를 준비해서 출발 당일에 모였다. 4대의 자전거 모두 고속버스 짐칸에 넣을 수 있는 접이식 자전거였다.

보름간 페달을 밟아도 튼튼할지 어쩔지에 대한 판단도, 사전 준비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자전거로 여행을 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서 너무나 용감했다.

그리고 여행이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이었던 고속터미널에서부터 우리의 난관은 시작되었다.

십 대를 갓 벗어난 내가 생각했던 것들은 내 상상 속에서 당연히 가능한 것들이었는데, 현실에서 만나면 자꾸만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 여행이 전반적으로 그랬다.


고속버스의 짐칸에는 접힌 자전거 4대가 잘 들어가지 않았다. 버스 아저씨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넣어주셨다. 우리도 발을 동동 굴렀지만 대안이 떠오르지않아서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버스 출발시간 직전에 자전거들은 꾸역꾸역 극적으로 짐칸에 밀어 넣어졌다.


버스에 앉아서 우리는 방금 전의 에피소드마저도 도전과 성공의 일환인 것처럼 웃고 떠들었다. 나는 보름간의 여행이 자아성찰과 같은 값진 것을 내게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껏 들떠서 부산으로 향했다.


버스 맨 뒷자리에 넷이 일렬로 앉아서 빠르게 스치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엄마한테서 문자가 왔다.


"엄마가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우리 딸의 멋진 도전 응원한다. 건강히 좋은 경험 많이 하고 돌아와."


멋진 도전. 나는 그 말에 심취해서 스스로 엄홍길 대장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서울 고속터미널에서 4시간 반, 부산에 도착해서 내리자마자 바로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2편에서 계속


https://brunch.co.kr/@cheerssally/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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