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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Sep 07. 2020

삿포로행 티켓을 샀고, 우리는 프라하에 도착했다.

가치관이 맞는 친구와 여행하는 행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가장 먼저 삿포로 날씨를 검색해본다. 9월 초 삿포로의 날씨는 일교차가 커서 내가 챙긴 옷들이 적합할지 걱정이다.


그때, 네이버에서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삿포로의 날씨보다도 삿포로의 지진 소식이었다. 2018년 9월 6일 새벽 3시경 홋카이도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약 6.7도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였다.


약 6.7도의 지진은 어떤 것일까..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을 해본다. 일본은 지진이 흔한 나라라고 했다. 도시의 모든 건물에 내진설계가 잘 갖춰져 있는 그런 나라. ‘꽤 흔들리던데요?’하고 유쾌하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목요일 아침을 시작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닐까?


물론 그것은 나의 무지와 간절함에서 나오는 잘못된 상상이었을 뿐이었다.

2018년 9월 6일 홋카이도 대지진

약 6.7도의 지진은 홋카이도 토마토아츠마 발전소에 타격을 주어 대규모 정전 사태를 일으켰고, JR선 전 노선이 운행 중지, 신치토세 공항 터미널에 침수, 그리고 공항의 비행기 전편을 결항시키며 내 상상을 몹시 송구하게 만들었다.

-헐. 뉴스 기사 봤지? 우리 여행 어떻게 되는거지?
-모르겠어. 일단 공항에서 보자.

우리는 일단 공항으로 갔다. 엄마가 오랜만에 인천공항을 구경한다고 감사하게도 그 새벽에 나를 공항까지 태워다 줬다.

결항소식과 함께 쓰레기통에 내던져버린 여행책자

비행기는 결항이었다.

내 친구 뽈과 나는 삿포로와 오타루 여행을 위해 7일간의 휴가를 썼는데, 이렇게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몰카이길 바라는 절망에 빠진 두 청년 옆에서 엄마는 그 속도 모르고 ‘야 진짜 재밌다. 너네 이거 엄청 잊을 수없는 기억이 되겠다’며 깔깔 웃었다. “아. 그래 엄마 빨리 집에 돌아가”라고 눈치 없는 엄마를 어서 보내고, 뽈과 나는 긴급회의를 시작했다.

억울하고 슬퍼서 잊을 수없는 기억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보니 그다음 날 비행기로 오키나와에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같은 일본이고, 환전도 엔화를 해놓았으니까 그럴 것이다.

그리고 당장 떠날 수 있는, 삿포로보다는 다소 저렴해 보이는 옵션들(방콕, 호찌민, 홍콩, 방비엥 등등)이 있었다. 뽈과 나 둘 다 지난 여행이 동남아였던 탓에 그 도시들을 하나씩 언급할 때 모두 ‘나쁘진 않아’ 정도의 호응이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시간대가 적당히 맞는 항공권이 없었다.

우리 프라하 갈래?

뽈이 내게 말하자마자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번 여행지는 프라하로구나.

일본을 가겠다고 나와서 갑자기 유럽을 갈 수가 있는 건지, 결제한 삿포로행 항공권보다 지금 프라하행 항공권이 72만 원이 더 비싼데, 삿포로 에어비앤비와 호텔 요금 그리고 신청해둔 원데이투어가 모두 환불 가능하긴 한 건지... 는 우리는 잘 모르겠고!!! 뽈과 나는 일단 프라하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빠르고 신속하게 여러 관문들을 통과해야 했다.

1. (공항 지하에 딱 한 군데 있는) 발권 가능한 여행사에 달려가서 프라하 항공권 발권

2. 틈틈이 핸드폰으로 삿포로 항공권 취소 환불 검색

3. 환전소에 가서 엔화를 유로화로 환전

4. 쓸모없어진 일본 와이파이 에그 환불

5. 프라하 항공권& 수화물 체크인

6.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 전까지 프라하 유심칩 & 호텔 알아보기

6박 7일의 삿포로 여행은 빠르게 5박 7일의 프라하 여행으로 대체되었다.


폭풍 같은 취소 요청과 재예약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프라하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제야 우리는 한숨 돌리며 이번 여행이 불운보다는 행운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삿포로에 도착하고 나서 지진이 났다면 어쩔 뻔했어?

그랬다. 지진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몇 시간 차이로 지진을 피한 엄청난 행운아들이었다. 그리고 에어비앤비를 제외하고 모든 예약을 무료 취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행운이라고 느끼는 것은 또 하나가 있었다. 바로 뽈과 함께라는 것.

뽈은 스스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고 좋아하는 것을 행하는데 망설임이 별로 없는 친구이다. 뽈은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사고 싶다’와 ‘샀다’라는 문장 사이에 좀처럼 여백을 크게 두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쇼핑이든 경험이든 도전이든 간에 그 결과에 크게 후회나 불평을 하는 것도 나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생맥주기계를 샀다는 뽈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프라하로 떠날 수 있었을까? 나도 여행에 쓰는 비용을 다른 어떤 것보다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소 부담이 되는 결정도 내가 끌리는 방향이 있다면 빠르게 해치우는 성격이기도 하다.


하지만 함께 여행하는 친구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친구는 더 신중하고 부담이 적은 선택을 원했다면, 나는 내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삼겹살을 좋아한다면, 나는 내가 꽃등심이 먹고 싶어도 다 덮어두고 '그럼 삼겹살 먹을까?'라고 묻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프라하성 아래에 있는 카페에서
여행을 할 때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동행자와 운명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때, 두 사람의 가치관이 맞는다는 것은 여행을 몇 배 더 즐길 수 있는 행운을 준다.


여행은 인생처럼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의 연속이다. 열차를 놓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현지 상인들에게 눈퉁이를 맞았을 때, 화를 내고 발을 굴러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는 친구. 순간의 불쾌함이나 분노가 여행을 지배하도록 눠두지 않는 친구. 즐거운 대안을 빠르게 찾고 함께 기뻐하는 친구.


그런 친구가 내 인생에 있어서, 그리고 함께 여행도 갈 수 있어서 나는 무척 행운이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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