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의 방콕 여행
내가 학교 다닐 때 우리 집은 생활이 늘 빠듯했다. 때문에 엄마는 아빠의 월급에서 한 번도 해외여행을 계획할 수 없었다.
내 기억 속에 우리 가족여행의 목적지는 항상 강원도였다. 하얀색 소나타에 넷이 올라타서 옛 영동고속도로를 달렸다. 아빠는 늘 고속도로 표지판에 인제가 나오면 '인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재미없는 농담을 했다. 구불구불한 산속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산신령이 나올 것 같은 대관령 휴게소가 있었다. 지대가 높아서 장마 전후에 늘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옥수수를 먹었고 나는 자주 멀미를 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다. 그때 관광지마다 화목해 보이는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을 보며 나는 한참 동안 우리 가족을 생각했다.
세상은 넓은 거라고 세계지도를 돼지 표 본드로 내방 한쪽 벽에 붙여줬던 엄마는 정작 그때까지 해외에 고작 한번 나가봤을 뿐이었다.
아빠는 '걸어서 세계속으로'같은 프로를 보며 젊은 시절 출장을 가서 보았던 것들을 내게 열심히 설명하며 아는 척을 했다. 그 아는 척들은 어쩐지 마음이 짠한 것들이었다. 세월은 20년도 더 지났고 세상이 그대로 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 나이 예순다섯에 우리는 첫 가족 해외여행을 갔다. 여행지는 방콕이었고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내가 계획한 4박 5일 자유여행이었다. 가족들과의 첫 여행이지만 나에겐 두 번째 방콕이었다.
엄마는 비행기에 타서 면세품을 구경하더니 갑자기 나와 언니에게 안나수이 립글로스를 사주었다.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평소라면 내돈으로 산다고 했어도 그게 꼭 필요한 거냐고 되묻는 것이 먼저였을 것인데. 나는 엄마가 많이 신난 것 같아서 그게 또 슬펐다. 엄마는 4박 5일 동안 밥을 안 해도 되는 게 제일 좋다며 손뼉을 쳤다.
첫날은 늦은 밤에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빌린 수영장이 딸린 아파트였다. 방콕에 있는 아파트들이 한국 아파트보다 훨씬 좋다고 아빠 엄마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집에서 짐을 쌀 때도 엄마는 방콕에서 신발이 없는 사람을 만나면 벗어주고 와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보다 좋은 신발 신는 사람이 더 많다'라고 말리며 우리의 여행지는 소말리아가 아니라 방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줬다.
여행 이튿날, 숙소를 떠나기 전에 여행 가이드이자 총무인 나는 가족들에게 비상금 천 밧씩을 나눠주었다.
"용돈이야. 돌아다니다가 먹고 싶거나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일일이 나한테 말하지 말고 사면돼" 나는 덧붙여 말했다.
아빠는 천 밧을 지갑에 넣었고 엄마는 매고 있던 크로스백 깊숙한 곳에 천 밧을 넣은 뒤 전혀 꺼낼일이 없다는 듯 지퍼를 꼼꼼히 닫았다.
카오산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행객들로 붐볐다. 나는 방콕 유경험자답게 현지 여행사를 찾아가서 능숙하게 메콩강 투어를 신청했다. 여행사 직원에게 작년에도 왔었다고 했더니 자기 입술에 검지를 올리며 쉿! 했다. 그리고서 50밧을 깎아줬다. 딱히 할인받았다고 자랑할 금액은 아니었다. 길에서 우리는 망고와 태국식 국화빵, 슈크림 만주를 먹고 오바마와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를 구경했다.
몇 시간 채 걷지 않았을 때 갑자기 엄마가 발이 아프다고 했다. 우리는 길거리에 샌들 가게가 있어서 엄마한테 샌들 하나를 사라고 했다. 엄마는 돈이 아깝다면서 괜찮다고 돌아섰다. 그랬더니 아빠가 쿨하게 본인 지갑에서 천 밧을 꺼냈다. 아빠가 사준다고 어서 고르라고 하니까 엄마는 그제야 신발을 몇 개 신어봤다. 엄마는 여행 내내 카오산에서 산 그 신발을 신었다.
우리의 방콕 여행을 생각하면 나는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이 하나 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시암 파라곤이라는 거대한 쇼핑몰에 갔다. 언니와 나는 구경하고 싶은 매장이 있었고 엄마 아빠를 대동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쇼핑몰 중앙에 쇼핑객들을 위한 소파가 여러 개 있었고 우리는 엄마 아빠에게 거기 앉아서 쉬라고 말했다.
“30분까지 다시 돌아올 테니까 여기서 잘 기다리고 있어. 어디 구경해도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언니와 내가 엄마 아빠한테 당부했다.
그때 나는 익숙한 상황이지만 전혀 반대의 입장에 놓인, 오묘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때 엄마랑 시장에 갔을 때 엄마가 늘 당부하던 말이 생각났다.
“만약에 엄마를 잃어버리면 돌아다니지 말고 딱 그 자리에 서있어. 그래야지 다시 만날 수 있어.”
다행히 나는 엄마를 잃은 적이 없었지만 그 당부는 강조되고 반복되어서 잊히지 않는 문장이었다.
이제 완전 반대가 됐구나, 나는 생각했다.
나는 항상 보호를 받는 입장이었는데, 여행 내내 나는 부모님의 보호자였다. 그때 이후로도 나는 병원에서 몇 번이나 엄마의 보호자였고 늙어가는 부모를 걱정하는 다 큰 딸(혹은 어쩌면 이미 같이 늙어가는 딸)이었다. 어쩔 땐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도 없이, 너무 빨리 늙어버린 부모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 멀었는데, 시간은 인정사정없다.
'엄마 아빠 너무 빨리 늙지 마요. 나는 스스로 보호하기에도 아직 벅찬 인간인가 봐요.' 속으로 말해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보호자 역할이 아니었다면 떠나지도 않았을 여행이었다.
엄마 아빠는 쇼핑몰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고 우리를 잘 기다려주었다. 아빠가 태국어는 중국에서 나무로 된 글자책을 가져오다가 심부름꾼이 글자책을 엎어버리는 바람에 저렇게 글자가 다 옆으로 누워있는 거라는 썰렁한 개그를 했고, 옆에서 엄마가 그 말에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둘이 개그코드라도 잘 맞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콕 여행을 시작으로 우리 가족은 호주, 베트남, 일본으로 여행을 부지런히 다녔다. 비록 작년에 엄마의 건강문제로, 올해는 코로나 문제로 전혀 여행을 못 가고 있지만, 우리는 더 늙기 전에 떠나야 한다. 부모님의 보호자인 자식들은 다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