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무와 진심의 충돌
산책의 핵심은 ‘목적 없음’이 아닐까?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산책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그리고 나는 하염없이 산책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안다.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아무리 요즘 학생들이 영리하다 해도 목표가 뚜렷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알고 있는 아이들은 드물다. (쓰면서 생각하니 서른 넘은 나도 내 방향을 잘 모르겠다.)
“저는 하고 싶은 게 없어요. 그래서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돈이 아주 많다면, 무얼 하고 싶니?”
“하고 싶은 거 없어요. 저는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십 년 차가 되어도 나는 강사로서 이런 아이들을 만날 때가 가장 힘들다. 아주 극단적으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아이. 심지어 죽고 싶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다.
똑 부러지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동기부여가 쉽고, 하고 싶은 게 없더라도 그저 잘 따라오는 아이들 역시 가르치기 쉽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게 없으므로 공부하는 것에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은 논리적이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영어단어와 문법을 그들의 머릿속에 집어넣는 과정이 고되고 힘들다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진심, 그들의 산책을 응원해주고 싶은 진심을 숨기는 것이 나는 가장 힘들다.
요즘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들과 엄마 아빠, 그리고 각 과목별 사교육 선생님들에게 둘러싸인다. 아이들은 공부도 다 때가 있으며 그때가 지나면 몇 배 더 노력해야지만 남들을 앞지를 수 있다는 것을 어른들에게 수없이 듣는다. 모두 인내하고 노력하라고 말할 것이다.
'아이들이 목표가 없는 것'과 '주변 어른들이 노력을 강요하는 것'은 가끔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모호하기도 하다.
나는 선생님이라기보다는 강사라서 학생이 원하는 점수에 도달하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노력을 강요하는 것이 내 의무라는 말이다.
목표를 찾지 못했는데도 사방에서 공부에 대한 강요와 압박을 받는 몇몇 학생들을 보면 나는 마음이 좋지 않다.
‘정신 좀 차리게 혼내주세요.’라는 학부모의 말에 '나까지 가세해도 괜찮을까?'하고 망설이게 된다. (혼날만하다고 생각하면 목청을 아끼지 않는 편이지만)
얼마 전 나는 정혜신 작가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봤다.
책에서 힘이 나지 않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가 필요한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너는 옳다’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행동을 묵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사람 존재 자체를 수용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공감과 응원은 결국 그 사람 내부에 있는 자정능력을 활성화시켜준다.
아이들에게는 강력한 자정능력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시험기간에 죄책감이나 불편한 마음 없이 신나게 놀아재낄 수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그들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다.
나 역시 고등학교 시절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이만큼 잘 성장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압박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내 의무를 저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학부모가 원하는 점수를 내는 것보다도, 그들의 방황을 그저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들은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목적 없이 산책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산책길에 결국 스스로 멋진 목표를 발견하리라고 믿으며 바라봐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