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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애플 Oct 18. 2024

위로에 필요한 시간, 단 5분.

2023년의 겨울에서


연일 영하 10도로 내려가는 강추위가 이어지던 이번주, 기어이 사고가 터졌다.

아무 생각 없이 빨래통에 있던 빨래더미를 집었을 때 수건이 얼어있는 걸 보고 눈치 챘어야 했는데,

언 수건을 그저 의아하게 여기며 빨래를 전부 세탁기에 집어넣고 심드렁하게 돌리다 갑자기 경고음이 울렸다.

'설마?' 싶어 베란다 문을 열고 세탁기를 마주하니 배수관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요근래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아 난감했던 날들이 무색하게,

나는 어디서 나오는건지 모를 힘으로 집에서 가장 뜨거운 물을 잘 먹을 것 같은 촘촘한 타월에 물을 적셨다.

그리고 배수관에 수건을 꽁꽁 감싸니 그제서야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세탁기.

안심하고 기다리려니 갑자기 또 멈춰버린 세탁기 소리에 다시 또 베란다로 뛰어나가 보니,

배수관 뿐만 아니라 세탁기 뒷판이 꽝꽝하게 얼어있는 걸 확인하고야 말았다.

다시 화장실로 달려가 뜨거운 물을 잔뜩 입힌 수건을 세탁기 뒷판에 감싸주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마지막까지 무사히 운행을 마치는 세탁기.


저렇게 무사히 세탁을, 그러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마칠 수 있는 세탁기가

살얼음이 어는 강추위에 작동을 멈추고 경고음을 내며 굳어있던 시간은 무려 30분 이상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따뜻한 수건에 세탁기를 감싸준 시간은 단 5분 가량.


그 5분간, 모두가 방치하고 있던 차가운 베란다에서 혼자 얼어있던 세탁기는 분명 수건의 위로를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면 이번 주 평일 내내 바쁜 가족들로 인해 한 번도 제 기능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갑자기 일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일텐데도. 단 5분만에 다시 자기 할 일을 하게 되다니......

수리 기사님을 굳이 안 불러도 되는 상황이 주는 고마움도 고마움이지만,

이번엔 세탁기의 너른 마음에 더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사물을 의인화 하기 시작하는 게 외로움의 끝에 도달했다는 증거라던데, 뭐 상관 없다.

지금 이 시점에서 5일간 차갑게 방치되어 있다가도, 5분간의 따뜻한 위로에 스르르 녹아버리는 건

내 앞의 기특한 세탁기 밖에는 없으니까.


더불어 느끼게 되는 한 가지는,

혹시 지친 일상 속에서 차갑게 얼어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시간과 힘 또한,

생각보다 그렇게 길거나 드세야만 하진 않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다.

어쩌면 정말 단 5분, 누군가의 존재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 

그의 언 마음 위에 온기가 담긴 손을 얹는 것 만으로도 위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아주 희망적인 생각이 내 마음 안에 따뜻한 온도로 차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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