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포빌라촌 거주자가 매주 반포자이 굴다리를 건너며 마주하는 평범함의 가격
연예인 포토카드의 시세가 천정부지로 솟을 때, 팬들 사이에서는 이를 ‘반포자이 포카’라 부른다고 한다. 그만큼 반포자이는 대한민국에서 부(富)의 대명사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이 아파트가 대명사처럼 불리는 것과는 별개로, 대한민국 사람 중 정작 이 ‘반포자이’ 일대를 실제로 걸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서울 아파트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지만, 사실 인근 주민이 아니고서야 이곳을 지나갈 일은 거의 없다. 애초에 ‘사평역’이라는 지하철역의 존재를 아는 사람부터가 몇이나 될까. 나조차 여기 살기 전엔 몰랐으니까. 반포의 아파트들은 사평역 출구를 마치 자기 집 대문 옆에 바로 박아놓은 듯한 형국이다
반포에 자취를 시작한 지 한 달 차, 나는 반포자이 일대를 서너 번 정도 가로질렀다. 주민센터, 도서관을 비롯하여 사회인프라시설이 그쪽 일대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흔히 부촌이라 생각하는 반포에도 빌라촌은 존재하고, 내가 사는 곳이 바로 거기다. 주소상으로는 서초구이지만 강남 생활권에 가까운데, 비쌀 거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이곳의 원룸 시세는 사당이나 서울대입구와 큰 차이가 없다. 보증금 500만 원에 관리비 포함 월세 58만 원. 내가 여기 사는 이유다.
이 빌라촌에서 주민센터나 도서관을 가려면 반드시 아파트 밀집 지역으로 넘어가야 한다. 가파른 언덕과 오르막이 반복되는 빌라촌을 벗어나, 반포자이로 향하는 작은 굴다리를 통과해야 비로소 평지가 나타난다.
빌라촌의 끝을 알리는 ‘반포훼밀리 아파트’를 지나면 작고 낮은 굴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그 옆으로 길게 늘어선 방음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빌라촌과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경계선 같다. 나는 이것을 ‘40억 통곡의 벽’이라 부른다. 저 벽을 넘어서는 아파트들은 대다수가 가장 작은 25평형조차 실거래가 38억 원을 찍고 40억을 넘보고 있기 때문이다.
굴다리를 통과하면 그 유명한 반포자이가 나온다. 대규모 재개발 단지가 으레 그렇듯, 단지 내부를 관통하는 통행로가 조성되어 있다. 큰길로 뺑 돌아가지 않고 도서관에 가려면 늘 이 단지 안을 지나야 한다.
막상 마주한 반포자이는 생각보다 단조롭다. 층고도 약간 낮아 보이고 외관도 여느 아파트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굴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 도로의 ‘때깔’부터가 달라진다. 자전거 도로가 매끈하게 깔려 있고, 모든 길이 완벽한 평지에 가깝다. 사실 경기 신도시 도로 상태랑 비슷한데, 빌라촌 경사가 심해서 대비 효과가 큰 탓도 있다. 빌라촌은 초인이 아니고서야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만만한 경사가 아니다.
걷다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이 이상함의 정체는 바로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무던하다’는 데 있다. 최근 방문했던 용인 신도시 아파트들, 동탄 부모니집이랑 비교해도 외관상으론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물론 아파트만!) 한남동 고급 빌라처럼 외관부터 위압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아마 사람들이 강남 아파트 시세에 눈을 부릅뜨는 이유는, 겉으로는 우리 집 아파트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국민평형(84㎡)이 48억 원을 호가하는 그 압도적인 숫자 때문 아닐까?'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단지 옆 중고등학교가 보인다. 이곳의 아이들은 이 안에서 자라나며 그들만의 견고한 커뮤니티를 만들 것이다. "부럽다, 얘들아..니네가 외동이기를 바란다." 혼잣말을 삼키며 아파트를 벗어나면 사평역이 나타난다.
사평역은 신논현과 고속터미널 사이에 있지만, 인터넷 검색창엔 소설 <사평역>이 먼저 눈에 띌 정도로 실제 역의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아마 반포 아파트 주거단지 한복판에 쏙 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포의 아파트들은 이 역의 출구들을 마치 오벨리스크를 나눠 가진 유럽 열강들처럼 각자의 출입구 앞에 하나씩 거느리고 있다. 출구가 아파트 대문 옆에 바로 박혀 있는 풍경. 이걸 보고 있으면 역세권의 참뜻을 알게 된다. 아, 역세권이란 아파트 단지 안에 역을 소유하는 거구나
횡단보도를 건너 반포리체 단지를 통과한다. 반포자이보다 나중에 지어져 확실히 더 정돈된 인상이다. 이곳 전용 84㎡ 평형도 최근 43억 원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반포자이도 역세권이지만, 여기는 지하철출구가 아파트 전용 시설인 것처럼 단지와 매끄럽게 붙어 있어 아예 역까지가 아파트의 일부인 느낌마저 든다. 그날따라 이용객이 많아 쑥스러운 마음에 사진은 남기지 못했다. 흔하디흔한 저 창문 한 칸 한 칸이 40억에서 50억을 호가한다는 사실에 내 금전 감각은 메이플스토리 게임 머니처럼 마비되어 버린다.
뱅크샐러드 앱에 따르면 나의 자산 순위는 30대 초반 여성 중 상위 8%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 아파트 실거래가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내 처지를 보면, 앱이 내 소비를 부추기려고 작당모의를 한 게 아닌가 싶다. 도대체 저 사람들의 부의 원천은 뭘까? 보통 직업은 뭘까? 보유세까지 내려면 꽤 벌어야 할 텐데, 아마 물려받은 돈이 많겠지? 3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친일파 아닌가? 부가 거기까지 올라가면 강북쪽 고급빌라 살지 않을까? 온갖 실없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면, 반포래미안 피트니스 센터에서 러닝머신을 뛰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곧 도서관이다.
도착한 반포도서관은 의외로 소박하다. 1층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저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흔한 풍경이 펼쳐진다. 3층 열람실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내 옆자리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숙제에 열중하는 초등학생을 힐끔 보면서, ‘그래도 저 친구는 여생에 배 곯을 일은 없겠군’ 같은 외람된 생각을 해본다. 자동문 소리가 매우 시끄럽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이상한 괴음을 울리는데, 집중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게 느껴진다
창밖을 보니 반포 아파트가 빼꼼히 보이고, 그 아래로 전형적인 상가 외관이 눈에 들어온다. '작게 보이는 저 아파트도 40억대겠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반포 빌라 생활 한 달 차, 나는 서울에 살고 싶지 않아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서울이 나를 이방인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대놓고 화려한 한남동 고급 빌라를 보면 ‘나와는 평행선이구나. 여기사는 사람들과 사적으로 얽힐 기회는 없겠군’ 싶겠는데, 이토록 일상적인 풍경이 최소 40억이라는 벽으로 다가올 때의 박탈감은 결이 다르다. 이건 열등감이라기보다 허무함에 가깝다. 내가 생각한 ‘최상의 평범함’을 누리는 대가가 최소 40억 원이라니. 이 도서관에 있는 대다수가 이토록 비싼 아파트에 산다니! 어떻게? 왜? 어디서부터? 무엇을 하면?
그날 밤, 나는 주문을 외우듯 잠들었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질 거야. 서울로부터 멀어질 거야.
서울로 정기적인 출퇴근을 하지 않는 삶을 살 거야. 서울과 멀어질 거야.
경기 남부의 6억 대 소형 아파트에 살면서, 고양이를 키우며
"그래도 여기 강남이랑 40분 거리예요 ㅎ"라고 멋쩍은 웃음을 지을 거야.
주말이면 차를 타고 더 남쪽으로 내려갈 거야. 20대들이나 홍대, 성수에서 놀라고 해.
나는 서울에서 멀어질 거야. 서울에서 멀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