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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걱정 많은 아저씨 Jan 28. 2024

임진왜란~정유재란(1592~1598) _ 두 번째

이총(비총)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1)

교토를 여행하면서 들었던 뭔가... 아쉬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는 구경은 가도, 참배를 하지 말라. 왜냐하면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이니까. 그리고, 이런 히데요시를 모시는 신사의 좌측 맞은편에 히데요시가 전공을 따지려고 장수들에게 바치라고 했던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모아놓은 이총(비총)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비통한 일이라는 글들을 여러 여행책자와 인터넷 게시물들을 통해서 접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총과 비총중 어느 명칭이 맞는가부터, 그곳에 묻힌 우리 조상들의 코와 귀의 숫자, 코무덤 위의 5층 석탑의 의미와 현재 관리되고 있는 형태 상황에 대한 평가 등.. 각기 다른 주장이 많았고 뭔가 혼동되는 점이 많아 한번, 찾아볼 수 있는 자료들을 모두 정리해서 읽어보고 관련 사실들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런저런 다양한 자료들이 있겠지만 먼저, 누구나 작성하고 제약이 없는 자료보다는 일단 전문가가 자료를 모아서 작성한 글과 기사들이 그래도 신뢰도가 높을 거라는 생각에 내가 가지고 있는 교토 관련 서적들에서 소개된 이총(비총)_(나는 교토라는 도시에 관심이 많던 시기에, 교토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다양한 중고서적들을 사서 모아놓았다.)과 신문(인터넷)에 기고된 이총(비총)관련된 전문가들의 칼럼들을 본 포스팅에서는 우선적으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2017년 2월에 이총 방문 후 남긴 구글지도 리뷰
당시 업데이트한 교토이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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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일반적인 내용을 나열해 보자.


1. 조선인 이총 (朝鮮人 耳塚), 교토귀무덤, 코무덤(京都耳塚)

 일본의 국가 지정 사적.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조선인 약 2만 명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이다. 무덤 위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만물의 구성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을 상징해서 쌓아 올린 고린토[五輪塔]라 불리는 석탑이 세워져 있고, 둘레는 돌로 둘러쳐져 있다. 높이는 약 7.2m, 석탑의 높이는 약 9m, 가로 폭은 약 49m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무장들이 부피가 큰 목 대신 가져갔던 것으로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보(豊臣秀吉譜)』에서 코를 자른 것은 야만적이라며 귀무덤이라고 쓴 이래로 귀무덤으로 바뀌었다.

 1597년 9월에 축조되었으며,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인 사이쇼 쇼타이[西笑承兌]는 코 공양 법회의 경문에서 ‘명나라와 조선의 전사자들’을 애도한다고 하면서 무덤 축조는 히데요시가 이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긴[慈愍] 결과라고 적었다. 그러나 희생자의 대부분은 비전투원이었기 때문에 이 법회는 허구의 공양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납치되었던 유학자 강항(姜沆)은 히데요시의 자민(慈愍)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에도시대 조선통신사 환영연회가 조선인이총 앞의 호코지[方広寺] 대불 앞에서 거행되었는데,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州]가 진언하고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중개하여 조선인이총에 대나무울타리를 쳤다고 전해진다. 1625년에는 조선통신사 부사 강홍중(姜弘重)이 조선인이총을 방문하였다.

1898년 히데요시 사망 300년 때 대규모 개수가 이루어졌는데 일본 제국주의화의 분위기 속에 히데요시를 국가의 위신을 신장한 인물로 재평가함으로써 조선인이총은 일본 국위 위신의 증표로 여겨졌다.

1915년 황폐해 있는 조선인이총 둘레 공교롭게도 히데요시를 존경하는 우익 인사 오바타 이와지로[小畑岩次郎]에 의해서 돌 울타리로 둘러쳐지고 무덤을 정비하는 등의 수리가 이루어진 이후, 1968년 4월 12일, 「호코지(方広寺) 석루(石塁) 및 석탑(石塔)」으로서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매년 10월에 위령제가 행해지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541

'한국학중앙연구원'이라는 곳에서 제공하고 있는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기술된 '조선인 이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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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토의 이총과 관련된 몇 가지 기사와 칼럼


1. 코무덤의 코들의 출처와 비석의 내용.

https://www.ge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9147


2. 이에야스와의 전쟁,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자결, 그리고 코무덤을 본 통신사들의 기록.

https://www.ge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0824

 조선의 초기 3회(1607년, 1617년, 1624년)의 일본사절은 ‘회답 겸 쇄환사 (回答兼刷還使)’라 했다. 회답이란 외교적 사항에 대한 답례라는 뜻이고, 쇄환이란 ‘빗자루로 쓸 듯이 모두 데려온다.’는 뜻이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전후 처리와 일본에 끌려간 10만 명 이상의 조선인 포로들을 ‘빗자루로 쓸듯이 모두 본국으로 데리고 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신뢰가 통한다.’는 의미의 통신사(通信使)는 1636년 4회 사신부터 사용되었다.

 조선 사신이 코 무덤을 본 것은 1617년 2차 사행 때부터이다. 1617년에 조선 정부는 포로 쇄환과 에도막부의 오사카 평정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정사는 오윤겸, 부사는 박재, 종사관은 이경직이었고 일행은 428명이었다.

 이경직의 『부상록(扶桑錄)』  8월 26일 일기를 읽어보자.

대불사 절 앞에 높은 구릉이 있어 무덤 모양 같았고, 석탑(石塔)을 설치했는데 수길(히데요시)이 우리나라 사람의 귀와 코를 모아다가 여기에 묻은 것이다. 수길이 죽은 후에 수뢰(히데요리)가 봉분을 만들고 비(碑)를 세웠다 하는데, 이 말을 들으니 뼈에 사무치는 통분을 견딜 수 없었다.”


3. 1624년에(조선의 3차 일본사절) 조선은 에도 막부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쇼군 세습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
https://www.ge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2764

 사신들은 에도를 다녀오는 길에 교토에 머물렀는데 1625년 1월 17일에 대불사를 찾았다. 부사 강홍중(1577-1642)의 『동사록』을 읽어보자.

대불사 절 앞에 봉분(封墳)과 같은 높은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 석탑이 세워졌다. 왜인들이, “수길이 조선 사람의 귀와 코를 모아 이곳에 묻었는데, 수길이 죽은 후에 수뢰(秀賴)가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하며, 어떤 사람은, “진주성이 함락한 후에 그 수급(首級)을 이곳에 묻었다.” 하니, 들으매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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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토의 이총과 관련된 몇 가지 논문

교토의 귀무덤에 대한 일고찰, 노성환 동아시아의 공동체를 위한 비총(鼻塚) 대책, 성기중

일본에 축조된 비총(鼻塚)의 의도와 대응책 연구, 성기중 조선시대 적대적 對日인식에 관한 고찰, 이규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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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간단히 내용과 내 생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로 전국시대의 실질적 패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막부 시대를 연 그가 1603년 쇼군으로 취임한 후, 1607년에 왜란 후 처음으로 조선의 사절이 일본을 방문한다.

 2차 조선사절은, 1617년 1, 2차 오사카성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 가문의 정통 후계자인 히데요리와 히데요리를 낳은 히데요시의 후첩, 요도도노(차차)가 자결하여 멸문한 후 일본을 방문한다.

이 1617년의 2차 사행 때부터 조선인들은 귀무덤 앞을 지나게 되며, 호코지에서 지내기도 한다.

 그리고, 약 250년 이후, 내부적 대립을 최소화하는 기조를 유지하던 에도막부가 막을 내릴 무렵, 구체제 타도를 목적으로 새롭게 떠오른 유신세력들은 정한론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적 국가운영 사고와 대륙진출의 뜻을 세운 후, 멸실되었던 도요쿠니 신사를 재건하는데, 이곳은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셨던 곳이다. 거의 300년이나 지났는데도 이 신사를 다시 세운 이유는, 그들의 대륙진출 욕망과 그 욕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볼 수 있다.


 본문에서 내가 중요하게 본 내용들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임진-정유재란, 특히 정유재란 때, 약 2만(~12만 6천) 개의 조선인 코를 전리품(혹은 각 무장들의 전공을 측정하고자)으로 잘라갔다.

2. 쌓인 코를 모아 무덤을 만들었고, 그 무덤의 이름은 '코무덤'이었다.

3. 무덤 위에는 '고린토'라 불리는 5층 석탑이 올려졌다.

4. 코 공양법회를 '사이쇼 쇼타이'가 했다. (정치적으로 조선침략 지원)

5.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의 전사자들을 애도'한다 했지만, 희생자 대부분은 비전투원이었다.

6. 이후 코무덤 혹은 코를 자른 행위가 야만적이라 하여, 이름을 '귀무덤_이총'으로 바꾼다.

7. 히데요시 멸문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는 조선친화(유화) 정책을 쓰며, 조선통신사를 일본으로 초청하지만, 그들은 이총을 보며 한탄하고,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와 가까운 호코지에서 머물게 된다.

8. 호코지는 몇 번의 멸실과 복원을 거치는데,


9. 1898년, 메이지 유신 이후(메이지 유신 1868~1889), 제국주의적 확장 분위기 속에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재평가하기 위해 '도요쿠니 신사 및 호코지'를 재건, 이총을 그 위신의 증표로 여김.

10. 1915년, 우익인사 _ 히데요시 관련 일본 전통극 배우 등이 이총석조 울타리 설치하고 재정비함.

11. 1968년, 이총 _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

12. 매년 10월에 위령제가 행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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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정리하다 보니 꽤 전문적인 자료들이 많다. 일단, 요 정도로 생각을 정리해 보고, 추가적인 자료 정리를 통해 좀 더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일관계 관련 내용들은 오류가 많으면 많이 혼나니까 말이다. >. <!

처음에는 취미를 통해 관심 갖게 된 내용을 가볍게 다루는 글을 쓰기 위해 역사를 조금 조사하고 내 생각을 살짝 덧붙이면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너무 커지고 있는 느낌...


 아~ 쉬운 게 없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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