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역사는 하나도 모르는, 교토여행이 마냥 즐거웠던, '민간인 무명 여행자'였던 나는, 자연스러운진 모르겠지만, 교토에 대한 관심이 전국시대로 이어졌고, 도쿠가와 이에야쓰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까지 들여다보다가, 당연하게도 임진왜란과 식민지시대, 2차 대전_그중에서도 태평양 전쟁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지금의 일본, 특히 교토여행을 하면서 "지금은 이렇게 되어있던데, 옛날엔 어땠길래 이렇게 돼있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드는 부분들을 제대로 알고 싶어 졌다. 특히많은 한국인 여행객들이 마음을 쓰고 애석하게 여기는 '도요쿠니 신사와 이총(비총)의 모습과 배치'에 대해서 알아보다가 "그래 한번 스스로 찾아서 정리해 보자."는 마음으로 '임진왜란-정유재란'부터 더듬더듬 찾아보고자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 ぶんろく・けいちょうのえき[*])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 전쟁을 생각해 봄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이 일어난 원인이고 그 중심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다.
일본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명나라 그리고 인도까지 정벌하려 했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조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헛된 야욕은 명나라는커녕, 조선의 남쪽 시작점에서 철저히 부서진다.
평생을 쉬지 않고 비상해 온 그의 성공인생도 폐망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데, 자신의 죽음은 물론이요 가문 전체가 몰락하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이 '임진왜란-정유재란'이다.
하여 나는 전쟁의 승패를 굳이 논하자면 조선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조선은 가늠할 수 없이 큰피해를 보았지만, '일본 전국을 통일한 패자'이자 조선침략을 통해 탐욕을 채우려 했던 그 당사자, 히데요시의 인생이 임진왜란 직전부터 본격적으로 박살 나기 시작했으며, 7년 동안의 조선침략은 히데요시의 생이 끝남과 왜군의 퇴각으로 마무리 된다. 그리고, 이 침략전쟁의 결과가 그가 평생 일궈온 모든 영광의 몰락과 가문의 멸망으로까지 이어지기에 더욱 그렇다.
'뭐라고? 그렇게 쉽게 결론 낼 수 있어?'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 해보았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부른 판단을 한 것일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일단 임진왜란 이전 10년, 정확하게는 히데요시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후, 임진왜란-정유재란과 히데요시의 죽음. 그리고 그의 정식 후계자 히데요리와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할 때까지의 사건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 보았다.
도요토미 히데요리 와 요도도노
그리고, 오늘날 교토에 남아있는 히데요시의 '도요쿠니 신사'와 그 정면 좌측에 있는 조선인 이총(비총)_'귀무덤(코무덤)'을 통해 임진왜란-정유재란은 현재의 일본과-한국에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알아보려고 한다.
호코지와 그 정면에 자리잡은 이총
먼저 시간순으로 임진-정유재란 관련 사건들을 정리해 보았다. (1582 ~ 1616)
1582 : 오다 노부나가 사망 (혼노사의 변)
1583 : 모리 가문 격파 (가와나카지마 전투)
1583 : 오사카성 축성 개시 _ 도요토미 히데요시
1585 : 규슈 정벌
1586 : 1차 호코사 건립 시작 _ 도요토미 히데요시 스스로
1589 : 7월 9일 _ 요도도노의 장남 _ 첫째 아들 츠루마츠 출생
1590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전국을 통일
1591 : 9월 22일(음력 8월 5일) 츠루마츠 사망
12월 28일 도요토미 히데츠구,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취임.
1592(선조 25) : 3월 임진왜란 발발, 일본의 1차 조선침략
8월 29일 오만도코로(히데요시 모친) 사망
7월 명군의 임진왜란 참전
1593 : 8월 29일 _ 요도도노의 두 번째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 출생
1595 : 1차 호코지 완성 (공사기간 10년)
7월 15일 히데츠(쓰) 구 폐위 후 할복
1596 : 1차 호코지 멸실, 지진으로 붕괴(완성 후 1년 만에 붕괴).
1597 : 2월 21일 정유재란( ~ 1598)
8월 16일 귀(코)무덤 완성 후, 히데요시와 상국사의 승려 사이쇼 쇼타이(西笑承兌) 면담.
9월 17일 히데요시, 귀무덤에 대한 시아귀 회법요(施餓鬼會法要)를 명함.
1598 :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왜군_일본으로 퇴각, 폐퇴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님 전사
1600 : 세키가하라 전투 _ 고니시 유키나카, 이시다 미츠나리,
1603 : 도쿠가와 이에야스 _ 세이이타이 다이쇼군 취임, 에도막부시대 시작
1607 : 선조 40 _ 조선통신사 일본 방문 (해사록, 경섬) _ 전 후 첫 번째
1614 : 2차 호코지 재건완료, (04월 19일_신사 범종 완성)
오사카성 1차 전투 발발, 10월 호코지의 범종에 새겨진 '국가안강 군신풍락'의 해석을
하나는 이에야스의 이름 家康을 安자로 잘라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臣과 豊을 이어놓아, 도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고 도쿠가와 가문에 대해 저주를
거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8월~10월까지 외교적인 소통이 있었지만, 끝내 오사카 전투 발발
1615 : 겨울 _ 오사카성 1차 전투 : 오사카성 외곽해자 해체
1616 : 여름 _ 오사카성 2차 전투 : 도요토미 히데요리 (히데요시 일가) 멸망.
1617 : 광해 9 _ 조선통신사 일본 방문 (부상록, 이경직) _ 전 후 두 번째
1624 : 인조 2 _ 조선통신사 일본 방문 (동사록, 강홍중) _ 전 후 세 번째
1748 : 조선통신사의 교토 이총방문, '조선인래조물어(朝鮮人來朝物語)',
'조선통신사이총견물회도((朝鮮通 信使耳塚見物繪圖)'.
동경 천도는 공식적으로 메이지유신 이후, 1869년 5월 _ 일왕이 동경의 '도케이성'을 '황성'으로 바꾸어 들어가면서 이루어졌다고 보며, 메이지유신 때까지 일왕은 교토에 있었으며, 동경 자체가 '동쪽의 도읍지'라는 교토에서 바라본 '에도'의 관점으로 명명된 것으로 볼 때, 아직 수도가 옮겨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고... 그런 만큼, 임진왜란 이후 '에도막부' 시대의 조선통신사들의 일본 방문도 교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럼 간단히 내 시각과 관련된 시간흐름을 정리한 것으로 첫 번째 공부는 마무리하고, 다음에는 이 총(비총)_귀무덤(코무덤)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작성해 봐야겠다.
도교제 국대학교수이었던 호시노 히사시(星野恒)이었다. 그는 1909년에 교토 대불전의 무덤은 코무 덤이지 귀무덤은 아니다는 것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이곳에 묻힌 것은 귀가 아니라 코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11)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원래 이 무덤은 코무덤이었던 것이 귀무덤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한국의 역사학자 정재정과 이재범은 의견을 달리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코와 귀가 묻힌 것이라고 해석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재범은 그에 대한 증거로 가토 기요마사(加 藤淸正)의 가신이었던 야마모토 야스마사(山本安政)의 기록과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의 가 신인 나가노 기타우에몬(長野喜多右衛門)의 기록을 들었다. 즉, 그는 야마모토는 “임진년에 주로 귀를 자르다가 조선인의 코를 자르기 시작한 것은 정유재란 때였다.”라고 하였고, 나가노 도 “조선인의 코를 자르기 시작한 것은 경장년간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그 증거로 삼 았던 것이다. 12)
그러나 그곳에는 코와 귀만 있을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아닌(않은) 것 같다. 그 예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직접 참전한 오코오치 히데모토(大河內秀元)가 쓴 조선 물어(朝鮮物語)에 의하면 “일본의 군사 16만이 토벌에 나서 조선인의 목 18만 538개, 명나라 사람의 목 2만 9,014개, 합계 21만 4,752개를 교토 헤이안 성 동쪽의 대불전 부근의 무덤에 석탑을 세우고 묻었다.”라 는 기사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귀무덤 속에는 귀와 코뿐만 아니라 머리가 묻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질문 02) 시아귀 회법요(施餓鬼會法要)가 뭐야? (GPT 4.0 _ 24.01.24.)
시아귀 회법요(施餓鬼會法要), 또는 '시에에키 법요'라고 불리는 이 행사는 불교의 전통적인 의식 중 하나로, 고통받는 영혼들, 특히 '아귀'(餓鬼)라고 불리는 굶주린 영혼들을 구제하기 위한 의식입니다. 이 의식의 목적과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아귀의 개념**: 불교에서 '아귀'는 욕심 많고 만족을 못하는 생활을 하다가 죽어서 탐욕의 결과로 고통받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불교의 윤회 교리에 따라 끊임없이 굶주림과 갈증을 겪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2. **의식의 목적**: 시아귀 회법요는 이러한 아귀 영혼들에게 음식과 기타 공양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더 나은 경지로 옮겨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고통받는 영혼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영혼에 대한 기도와 공양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3. **의식의 실시**: 전통적으로 이 의식은 '오본'(お盆) 기간에 실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본은 조상들의 영혼이 현세로 돌아오는 것을 기념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행사입니다. 시아귀 회법요는 특히 절에서 법회와 함께 진행되며, 다양한 의례와 의식을 포함합니다.
4. **의미와 중요성**: 이 의식은 불교의 교리 중 자비와 연민의 중요성을 상징합니다. 또한, 살아 있는 이들이 죽은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아귀 회법요는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인 윤회와 연민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아시아 문화에서 여전히 중요한 종교적, 문화적 행사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