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관동대지진

자료정리

by 걱정 많은 아저씨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일어난 규모 7.9의 관동대지진

약 10만 5천 명 사상자가 나왔던 자연재해. 6661명의 조선인 희생자.

벌써 백 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최근 우리가 다시 한번 들여다볼 만한 역사적 사건이다. 계엄령과 국가폭력 성난 민중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에 대한 역사적 사례로서 우리가 한번 자세히 알아보아야 할 듯하다.

1. 조선인을 죽여라 - 학살, 그 후 100년 #간토대지진 | 추적 60분 1335회 KBS 230901 방송

- 영화 '인 메이츠'의 출연자 '후니', 2023년 상영금지 처분.

- 아사노 조선소 터에서 강제징용으로 일하던 조선인들이 학살당함.

- 감춰진 손톱 (1983) : 다큐멘터리 영화 _ 1982년 조선인 희생자 유골 발굴 작업 (도쿄 아라카와)

- 니시자키 마사오 (조선인 희생자 추도 모임 '봉선화' 대표)


- 일본 방위연구소 전사연구센터,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이 각 지방에 보낸 전신문 (1923.09.02. 추정).

-> '조선인은 각지에 방화하며,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려 방화.'

-> '조선인의 방화 때문에 계엄령 시행.'


2. 후쿠시마 미즈호(사회민주당 참의원) : 경보국장의 전신문 존재여부 청문회에서 질의.

-> 조선인의 방화 때문에 계엄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경보국장의 전신을 통해 전국에 퍼져나감.

-> 위와 같은 전신과 계엄령의 선포가 학살의 주된 원인으로 보고 있음.

-> 일본국회 _ 참의원 법무위원회 _ 2023년 6월 15일

-> 이 전보는 당시 경찰 중앙 조직이 조선인들의 방화로 힘든 상황이어서 계엄령을 내린 만큼

각지에서 엄중하게 단속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 "당시 국회 본회의에서 나가이 류타로 의원도 이 전신문을 들고 질문을 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당시 나가이 의원도 유언비어를 단속해야 할 정부가 스스로 낸 유언비어에 책임을 느끼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며 "그러나 (정부는) 지진 직후 발생한 불상사의 이유가 사람들이 퍼뜨린

유언비어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 나가이 류타로(일본어: 永井柳太郎, 1881년 4월 16일 ~ 1944년 12월 4일)는 일본의 정치인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A%B0%80%EC%9D%B4_%EB%A5%98%E D%83%80%EB%A1%9C

4.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 관동대지진 재해 당시 조선인 학살과 그 후-학살의 국가책임과 민중 책임.


-> ‘불령선인(제국 일본이 자기네 말을 안 듣는 조선인을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 부르던 말)이 우물에 독을 탔다, 살인 방화를 저지른다’라는 유언비어 때문일까? 아니다. 답사 해설을 담당한 세키하라 실행위원회 공동대표에 따르면, 가타야나기 지역의 경우 피난민들의 입을 통해 퍼진 유언비어보다 사이타마현 측이 각 군정촌 사무소에 보낸 통지문이 더 빨랐다. 이 통지문은 9월 2일 오후 5시 사이타마현 지방과 과장이 내무성과의 회의를 마치고 현청으로 복귀한 뒤 현청의 내무부장에게 보고했고, 그 정보를 기초로 내무부장이 경찰부장과 협의해 작성했다. ‘불령선인 폭동에 관한 건 이첩’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도쿄에서 불령선인의 망동이 있고 또한 그 기간 과격한 사상(사회주의)을 가진 자들이 함께 일본인을 살해하려 드니 당국자는 재향군인분회, 소방대청년단 등과 일치단결하여 이를 경계하고, 공격을 받으면 재빨리 적당한 방책을 강구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9월 2일 저녁 사이타마현은 관할 군청에 전화를 해서 통지문을 전달했고 군청이 다시 관내 각 마을사무소에 문서나 전화로 알렸다. 그저 입소문이 아니라 관청이 나서서 유언비어를 생산하고 그것의 신빙성을 보증하고 빠르게 전달했다. 그 결과 9월 3일부터 각 지역에서 야경 보초를 서던 자경단이 ‘불령선인’을 경계하기 위한 조직으로 바뀌거나 새로이 조직된다. 가타야나기촌 소메야구도 오후 3시께 통지문을 전달받고 소방, 재향군인청년단이 공동으로 야간 경비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약 12시간 후인 9월 4일 새벽 2시께 강대흥을 죽였다.

학살에 대한 국가 책임과 민중 책임

지진 발생 당일인 9월 1일 저녁부터 경찰관들이 조선인이 방화와 살인을 저지른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고, 다음 날부터는 군인들도 적극적으로 유언비어를 유포하며 내무성 경보국장과 사이타마현 내무부장이 조선인 경계 지령을 내린다. 게다가 경찰관이 조선인 학살을 용인하는 발언까지 하기 때문에, ‘조선인을 여러 명 죽였다’고 자랑하는 일본인이 나올 정도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학살 그다음이다. 국가권력은 국가책임을 피하기 위해 조선인에 의한 일부 폭행을 ‘다수의 사실’로 선전했고, 학살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경단에게 전가했다. 그렇다고 자경단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정상참작을 통한 집행유예가 많아 실제로 투옥된 비율이 낮았다. 강대흥을 죽인 소메야의 자경단 5명도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죄로 집행유예를 받았을 뿐이다. 야마다 선생은 자경단에 대한 재판은 ‘보여주기식 재판’이라고 비판한다.



1. 조선인을 죽여라 - 학살, 그 후 100년 #간토대지진 | 추적 60분 1335회 KBS 230901 방송

https://youtu.be/7WG9yeZppe4?si=1ctIw3N418Mt2Xii

2. https://www.yna.co.kr/view/AKR20230615139300073

3.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489

4.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975


keyword
이전 10화히로시마의 기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