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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대지진, 관동 계엄령, 제주 4.3

어제는 오늘과 맞닿아 있다.

by 걱정 많은 아저씨

여의도 대지진, 관동 계엄령, 제주 4.3

24년 12월 여의도에서 ‘지진’이 있었던 것 같다. 분명 엄청난 ‘대지진’이었으리라…. 계엄령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포고문은 간단했다. 1. 정치활동을 금한다. 2. 허위 선동을 금한다. 3. 언론, 출판은 통제받는다. 4. 집회를 금한다. 5.48시간 내에 현장에 복귀하지 않은 의료진은 처단한다. 6. 선량한 국민의 불편은 최소화한다. 포고령을 위반하면 처단한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223


계엄선포를 실시간으로 본 나는 어질 했다. 먼저 내 노모께 전화를 드려 계엄이 뭔지, 이때는 뭘 해야 하는지 여쭸다. 출근해도 되는지, 애들은 학교에 가도 되는지 확인했다.

정치 활동을 금하기 위해 대한민국 군인들이 대한민국 국회에 도착했다. 그들은 국회에 진입하려 했고, 이를 시민과 국회가 저지했다. 아마 그들도 ‘지진’은 없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내 일터에서도 내일쯤엔 국군이 파견되어 우리 대학생들이 모여 출판물로 강의하는 내용을 검열하겠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나처럼 ‘지진’을 못 느낀 건지, 국회에 출동했던 대한민국 군경도 어리둥절해 보였다. 국회 봉쇄와 진입을 저지하는 사람들에게 감사까지 표하며 돌아갔으니 말이다. ‘지진’을 못 느낀 시민들의 뜻이 ‘비상계엄해제 요구 결의안’으로 12월 4일 새벽에 가결, 계엄이 해제되었다. 하지만 계엄의 부작용은 환율 불안을 시작으로 사회 전반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이 오판에 대한 문책과 처벌은 되지 않고 있으며, 이런 혼란이 120일 넘게 지속 중이다.

‘계엄’이 그저 짧은 ‘해프닝’이었다며, 책임자들이 웃으며 돌아다닌다. 시민들이 갈라져 싸우고 있다. 시민이 시민을 검문하고, 한국말을 해보라고도 하고 욕도 해보란다. 사적 폭력이 공기관을 위협하고 파괴한다. 공권력이 그런 그들을 방조하고 용인하는듯한 상황이 끝나지 않고 있다.

무식한 나는 계엄령을 공부해 보았다.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군이 국가 운영을 맡는 일이라는 원취지에 맞는 사례를 찾으려 애써보았다. 그나마 명분 있는 예시를 하나 찾았다. 약 100년 전, 1923년 ‘관동 대지진’, 약 10만 명의 사상자와 200만 가구가 파괴된 규모 7.9의 대지진으로 일본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위키피디아


이때, 일본 정부는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불령선인 폭동에 관한 건 이첩’이라는 공문을 내린다. 불량 조선인들을 ‘불령선인’이라 칭하고, 이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일본인을 살해하려 드니 당국자는 지역의 재향군인, 소방단 등과 이를 경계하고, 공격받으면 방책을 강구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라는 낭설까지 퍼진다.

국가기록사진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자경단은 검문소를 세우고, 조선인들을 색출했다. 어려운 일본어를 발음하지 못하면, 조선인으로 간주해 처단했다. 피를 본 자경단은 폭주했다. 그들은 공권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조선인을 내놓으라 했다. 한 일본인 경찰서장은 ‘독을 탔다는 물을 가져와라. 마셔보겠다.’라며 폭도들을 저지, 공적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나라시노 수용소’와 같은 곳에서는 수감된 조선인들을 성난 군중에게 내주어 사적 폭력에 묵인 동조했다. 계엄 기간 5일 동안, 독립신문 기준, 6,661명의 ‘사람’들이 ‘사람’들에 의해 학살됐다.

연합뉴스


그 규모를 가늠해 보았다. 내가 일하는 대학의 학생은 약 7천 명이다. 6,661명의 죽음은, 한 대학의 전교생이 살해당한 것과 같다. ‘공권력이 사라진 것’은 이렇게나 무섭다.

굳이 국가와 민족을 나눌 필요도 없다. ‘제주 4.3’, 이 쓰라린 역사는, 1948년의 계엄령 선포가 ‘그 비극의 시작’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2024년, 대한민국에 지진은 없었다.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도 없었다. 하지만 계엄령은 선포되었다. 정치의 선호를 넘어, 이것이 얼마나 무섭고 큰 갈등과 분열, 죽음의 씨앗이 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 다시 2025년의 4.3이다.

2025년의 대한민국은 '100년 전의 관동'과는 같지 않다. 그리고 '77년 전의 한국'과도 다를 것이다. 비통함 속에서 죽어간 우리 선조들의 넋을 기리며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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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년 2월 말, 처음으로 가 도쿄

도쿄 신주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관동 대지진때 조선인 폭동관련 혐의로 정식 재판을 받았던 박열열사, 그리고 독립운동가 이봉창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곳을 찾아가는길
주택가의 놀이터 구석에 위령비가 서있다. 벌써 어떤분이 술 한잔을 올리고 가신듯, 참이슬이 한병 놓여있었다.
나도 제주에서 가져간 한라산 소주를 올렸다.
위령비 주변을 정리하고 바닥의 태극기를 정리해 꽂아 놓았다. 잠시 묵념을 했더니, 내 뒤에 또 다른 한국 아주머니가 찾아오셔서 선물용 한라산 두병을 드렸다.
일본 도쿄 신주쿠에서 약 10~20분 거리. 요쵸마치 아동놀이터. 한적한 주택가 그분들이 수감되어 계셨던 교도소터에 쓸쓸히 서 있는 위령비


https://maps.app.goo.gl/3mwkvXtFwgmUCovr9



http://www.samda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44226





참고자료

https://www.yna.co.kr/view/AKR20160502135900056

https://ko.wikipedia.org/wiki/%EA%B0%84%ED%86%A0_%EB%8C%80%ED%95%99%EC%82%B4

https://ko.wikipedia.org/wiki/%EA%B0%84%ED%86%A0_%EB%8C%80%EC%A7%84%EC%9E%AC

https://www.ehistory.go.kr/view/photo?mediaid=3450&mediasrcgbn=PT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706934.html?utm_source=copy&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50401

https://omn.kr/1kpoj

https://www.yna.co.kr/view/AKR201308211547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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