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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걱정 많은 아저씨 Apr 22. 2024

히로시마의 기일

교토와 히로시마

히로시마의 기일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히로시마에 가자.”

 교토에서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잃은 조선인 코무덤을 알게 된 후, 몇 해 동안 일본 여행은 가지 않고 있었다. 한데, ‘하필 히로시마?’

 핵폭탄이 터진 세계 최초의 피폭 도시…. ‘그곳에 왜 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일본 여행이었으니…. ‘그래, 한번 가보자.’ 아내의 말을 따랐다.

 난생처음 가본 히로시마는, 내가 가봤던, 일본의 여느 도시들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었다. 오랜 유적과 문화재들이 가득하고, 곳곳에 노포와 전통 가옥들이 늘어선, ‘‘나무’로 만들어진 세상’이 내가 경험했던 일본의 전경이었다면, 히로시마는 번쩍이는 빌딩과 곧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가 질서 정연하게 뻗어있는, ‘‘쇠와 돌’로 된 신도시’ 같았다. 식견이 짧은 나에게, ‘히로시마’라는 이름으로 연상되는 단어가 ‘핵폭발’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1945년, 8월 6일, 08시 15분, 인구 35만의 도시 히로시마는 ‘2차 대전의 마침표’를 찍을 곳으로 결정됐다. 그리고 그 ‘마침표’는 아직 그 누구도, 심지어 제조국인 미국도 그 위력을 정확히 몰랐던 신병기, ‘핵폭탄’으로 찍힌다.

 피폭 후보지들이 더 있었지만, ‘천년의 수도’였던, ‘교토’는 문화 역사적 가치 등의 이유로 제외되었고, 군수-군사 시설이 밀집된 노동자들의 도시 중, 원폭을 투하하기에 맑은 하늘, 좋은 날씨였다는 이유로, 히로시마는 폭탄을 맞는다.

 약 6만 명의 일본인이 원폭으로 즉사했고, 약 2만 명의 조선인들, 그리고 조선의 왕족이자 고종의 손자인 ‘이우’ 공자도 원폭과 함께 증발해 버렸다. ‘전범국인 일본’을 제외하면,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원폭 피해국’이 되었다. ‘방사성 물질 피폭’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시절 ‘원폭 폭심지’ 수습에도 조선인들이 동원되었고 조선인 피폭 2세들이 지금도 ‘경남 합천 평화의집’에 계신 것을 보면, 그 피해가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복잡 미묘한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곳으로의 여행.

 평범했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핵폭발에도 그 뼈대가 남았다는 ‘원폭돔’과 그 옆에 커다랗게 자리한 ‘평화공원’을 보니 그 위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평화공원에 조선인 위령비가 있다기에 찾아가니 그 주변을 정리하고 계신 분들이 계셔서 인사말을 건넸다.

“저희는 히로시마 한인회 사람들이에요. 유족은 아니지만, 우리 조상님들이시니까 매일 두 명씩 봉사활동을 나오고 있어요.”

 히로시마를 단순한 여행지로만 여겼던 것이 부끄러웠다.

 삼다수, 한라산 같은 제주의 물과 술이 위령비 앞에 놓여있는 것을 , 이미 많은 분들이 인사를 드린듯했고, 나도 가져온 음료를 놓고 아이들과 절을 올렸다. 

 위령비를 잠시 보고 있자니 공양 올린 술, 음료들이 많아 얼룩지거나 벌레가 꼬일 만도 한데, 말끔한 모습이 새삼 달라 보였다. 봉사자분들께 여쭤보자. “얼마 전 일본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이곳을 소개하며, “한국 사람들은 조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효심 있고 예의 있는 민족이라서, 이 위령비도 늘 정성껏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데, 참 뿌듯했답니다.”라며 기쁘게 미소 지으셨다. 순간, 큰 기대 없었던 여행이 특별해지는 걸 느꼈다.

 우리는 기일이 되면 조상님들께 제사를 올린다. 하지만, 내 가족도 아닌 분들을 조상님이라서 매일 찾아뵙는다는 교민 분들의 정성은 내 부모를 모시는 마음보다 더 애틋하고 따뜻해 보였다.

 제주로 돌아온 나는,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4.3 평화공원’을 찾아가 제주 내려온 지 7년 만에 처음으로 인사를 올렸다.

 원폭은 1945년에 있었다. 100년이 채 안 되었다. 아직도 우리 세대의 많은 분들이 직간접적인 피해로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일제 36년은 잊자. 새로운 관계를 열자.’며, 마치 ‘과거의 아픔은 무시하자.’와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요즘 듣곤 한다.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와 “제주 4.3은 1947년에 있었던 일이니, 이제는 잊자.”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상상도 되지 않는다.


  되려, 반문해 보고 싶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찾는 히로시마의 교민들은 이제 그 일을 그만둬야 할까?’

'제주 4.3. 추모’는 이제 그만해도 될까?’

‘우리들의 부모님 기일은 이제 잊어도 될까?’




히로시마 교민 봉사자님들


조선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 강제징용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700


-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605


-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1018242.html


- https://news.koreadaily.com/2023/11/19/society/generalsociety/20231119192023801.html


- https://www.kdemo.or.kr/d-letter/all/page/10/post/1329


- https://cafe.daum.net/peacehousehapcheon


- https://youtu.be/JTY_PBV_YIA?si=S1ZxNto7AJjn4lG0

언젠가의 히로시마 #1
뉴제주일보 2024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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