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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걱정 많은 아저씨 Apr 07. 2024

일본 원폭

그전과 후

먼저 역사적 사실을 시간대 순으로 정리해 보자.


1.

https://www.ge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6059

일본이 항복을 거부하자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에 나타나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꼬마(리틀보이)’라는 별명의 원자폭탄은 1,500미터 상공에서 섬광을 발하고 낙하해 58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다. 시가지는 파괴되었고 20만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8월 10일 새벽 2시, 소화(昭和) 천황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고,  모든 해안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의심스럽소. 연합군의 선언을 수락하자는 제안을 재가하오.”


8월 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천황의 녹음된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흘렀다. 옥음방송은 중계기를 통해 방송되는 방식이라 라디오 음성은 그다지 깔끔하지 않았다. 또 내용도 알아듣기 매우 힘든 일본어 고문어체여서 처음 방송될 때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 후 방송요원이 일본어 구어체로 해석해 재차 방송하여, 국민들은 항복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날 한국은 해방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38도 선을 분기점으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할되었고,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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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1018242.html


한국 정부와 민단이 위령비 건립을 추진한 지 27년 만에 이뤄낸 성과라 다들 감격스러운 모습이다. 히로시마엔 1970년 한국인 위령비가 세워졌지만, 나가사키에는 없었다.


원폭 투하 당시 나가사키에 있었던 권순금(95) 할머니도 지난 5일 한국 특파원들을 만나 “기쁘고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권 할머니는 한국인 위령비가 없어 1960년대부터 나가사키시가 주최하는 원폭 희생자 위령제에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결국 강제동원 한국인 원폭 희생자를 설명하면서 ‘강제’라는 표현 대신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라는 문구를 넣는 것으로 타협해야 했다. 일본 정부는 불법적인 강제동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 세워진 한국인 위령비는 비극적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8월9일 오전 11시2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이곳에 살고 있던 24만여명 중 7만4천여명이 숨졌다. 일본인 다음으로 피해가 컸던 것은 조선인이었다. 위령비 안내문에는 “나가사키시와 주변 지역에 (조선인) 약 3만5천명이 거주했고, 수천 명에서 1만명으로 추정되는 우리 동포들도 목숨을 잃었다”고 적혀있다.


사실 나가사키에는 한국과 관련한 또 하나의 원폭 희생자 추모비가 있다. 나가사키 조선인 원폭 사망자가 1만명이라는 것을 1981년부터 자료와 현장 조사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낸 고 오카 마사하루 목사와 일본 시민들이 지난 1979년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세웠다. 이들은 매년 8월9일 오전 7시30분에 추모행사를 한다. 벌써 42년째다. 이번에 세워진 한국인 위령비와 걸어서 2~3분 거리에 있다.


하지만 추모비에 ‘조선인’이라고 적혀있고 재일조선인총연합회 소속 사람들이 추모행사에 참여하면서 민단 중심의 한국인들은 이 추모비와 거리를 뒀다. 남북 분단의 갈등은 ‘원폭 희생’이라는 공통의 아픔마저 함께 나눌 수 없게 만들었다. 강성춘 단장은 “전후 이미 두 개(남북한)의 나라가 됐는데, 한국인이라는 표현이 없는 등 추모행사에 동포들이 참여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이에 신카이 부이사장은 “추모비에 적힌 조선인은 (일제강점기) 당시 표현을 쓴 것이지 북한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식민지도, 분단도 모든 원인은 일본에 있다. 우리와 시간이 겹치지 않으면 내년부터 민단의 추모 행사에도 참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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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https://www.kdemo.or.kr/d-letter/all/page/10/post/1329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에도 6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원폭 피해자들과 그 천형을 물려받은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 등으로 끌려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다가 피폭을 당한 이들과 그 후손들이다. 한 마디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이끈 미군의 원자폭탄에 의한 희생자가 비단 일본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조선인은 내 나라의 전쟁이 아니었음에도 전체 원폭 피해자의 10퍼센트 정도인 7만 명에 달했을 만큼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중 약 4만 명은 피폭 당시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는 3만 명 수준이었다. 3만 명 가운데 2만 3천여 명은 해방 뒤 한국으로 돌아왔고, 7천 명 가까이는 일본에 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2년 고 김형률(1970~2005) 씨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그것도 스스로 자신이 원폭 피해자의 2세 환자임을 대내외에 밝힌 것이다. 그의 발언은 원폭에 의한 문제가 단순히 피폭 당사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후손으로도 이어질 수 있음을 세상에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고,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일본이나 대만 등 해외에서도 공론화하는 단초가 되었다.


 고 김형률 씨는 자신의 역할을 증언자 수준에서 끝내지 않았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원폭 2세 환우 공동대책위원회’와 함께 원폭 2세 환자들의 생존권 보호와 인권회복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함으로써, 이듬해 한국 정부로 하여금 한국인 원폭 피해자 1·2세들의 실태 조사에 들어갈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실제로 정부는 2005년 전국의 원폭 피해자 2세 1,226명을 대상으로 우편 설문조사를 실시해 ‘원폭 피해자 2세의 기초 현황 및 건강 실태조사’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드러난 사실은 실로 놀라웠다. 심근경색과 협심증, 빈혈과 같은 만성질환을 비롯하여 암이나 우울증, 정신분열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정도가 부모가 피폭 당하지 않은 또래들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즉 심장 관계 질환은 80배 이상, 우울증은 약 70배, 조현병 발병 빈도는 약 20배에 달했다.


 원폭 피해자, 그 중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와 태평양전쟁의 결과로서 발생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는 단순한 질병 치료 지원의 문제가 아니다. 독립운동이 지향한 바와 민주화운동이 향한 방향이 그러했듯, 원폭 피해자 지원은 곧 인권의 문제다. 특히 피폭 1세들은 일제강점기에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이며, 유례 없는 피해를 입고 귀국을 해서도 아무 도움 없이 그저 방치되어 온 이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사회운동가와 종교인 그리고 시민들이 나서서 지난 2010년 세운 ‘합천 평화의 집’은 인상적이었다. 국가가 채 하지 못한 일을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스스로 풀어가려는 노력이, 피폭자와 그 2~3세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애틋했다. 최근에는 통과된 특별법과 대통령 시행령의 개정과 재의결을 위한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가 발생한 지 벌써 72년이 흘렀다. 그런데 아직도 심각한 후유증과 고통에 직면한 우리 사회 또 하나의 구성원인 원폭 피폭자와 그 자녀들에 대한 지원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 특히 피폭이란 것을 바다 건너 일이라 생각하는 시민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이야말로 세계 제2의 피폭 국가이며, 동시에 피폭 문제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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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https://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5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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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https://news.koreadaily.com/2023/11/19/society/generalsociety/202311191920238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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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https://cafe.daum.net/peacehousehapcheon


https://cafe.daum.net/peacehousehapcheon/Lych/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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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보자니....

 원폭은 개발과 사용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고민들이 있었지만, 원폭투하 이후 직접적인 피해자들과 특히,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피해에 대한 자료들은 이 역사적 사건의 규모에 비춰볼 때,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이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를, 핵폭탄의 전시 실전 사용과 그 여파에 있어서, 결코 제3국이 아님을 여러 측면에서 돌아볼 필요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참... 내가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조금 더 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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